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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성이씨:진보이씨(李)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진성:진보이씨)

 

본관(本貫): 진성(眞城): 진보(眞寶)

시조(始祖): 이석(李碩)

유래(由來):

 

진성 이씨(眞城李氏)의 시조 이석(李碩)은 누대로 진보현(眞寶縣)에 토착해온 호족(豪族)의 후예로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진보현의 아전(衙前)으로 있다가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했고, 그의 맏아들 자수(子修)가 충숙왕(忠肅王) 때 문과에 급제하여 1362(공민왕 11)에 일어난 홍건적(紅巾賊)의 난 때 전공을 크게 세워 안사공신(安社功臣)으로 송안군(松安君)에 봉해졌으므로 그 귀()로 인하여 시조 석()은 봉익대부(奉翊大夫)로 밀직사(密直使)에 증직(贈職)되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이석(李碩)을 시조로 받들고, 선조의 본향지인 진성(眞城)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시켜 문장과 도덕의 전통가문으로 명망을 떨쳤다.

 

가문의 중요 인물

 

이운구(李云具)

조선 초기에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역임했다.

 

이양검(李養儉)

운구(云具)의 차남으로 군수(郡守)를 역임.

 

이양호(李養浩)

운구의 아들로, 주부(主簿)를 역임했다.

 

이정(李禎)

한편 송안군 자수의 둘째 아들로 부정(副正)을 지내고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증직(贈職)된 운후(云侯)의 아들 정()은 선산도호부사를 역임한 후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증직되었고, 슬하에 아들 우양(遇陽흥양(興陽계양(繼陽)이 현달(顯達)하여 가세를 일으켰다.

 

이우

1469(예종 1)1517(중종 1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보 ( 眞寶 ). 자는 명중(明仲), 호는 송재(松齋). 운후(云侯)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선산부사 정()이고, 아버지는 진사 계양(繼陽)이며, 어머니는 부사직 ( 副司直 ) 김유용(金有庸)의 딸이다. 이황 ( 李滉 )의 숙부이다.

1492(성종 23) 생원이 되고, 1498(연산군 4)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었다. 이어 예문관검열·대교·봉교를 거쳐 1501년 성균관전적에 올라 사간원정언·이조좌랑·사헌부헌납·병조정랑 겸 지제교·사헌부장령 겸 춘추관기주관·봉상시첨정·사간·군기시부정 등을 역임하였다.

1506년 동부승지에 임명되어 지제교와 춘추관수찬관을 겸했다가 마침 입직하던 날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이에 가담, 협력하였다. 그 공로로 정국공신 ( 靖國功臣 ) 4등에 녹훈, 청해군(靑海君)에 봉해지고 우부승지로 벼슬이 승진되어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을 겸하였다.

1508(중종 3) 부모 봉양을 위해 외직을 희망, 진주목사로 부임해 청렴과 검소를 위주로 백성을 다스려 왕으로부터 특별히 옷감이 하사되었다. 이듬해 동지중추부사로 전임, 호조참판 겸 오위도총부부총관·형조참판을 거쳐 강원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양친 봉양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그 뒤 영해·김해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앞서 반정공신 책봉 당시에 그의 녹훈 문제로 물의가 있었는데, 1514년에 입직 승지로서 신하의 도리에 어긋나게 행동했다는 비난을 받아 삭훈되었다가 이듬해 안동부사로 서용되었다.

문장이 맑고 전아(典雅)하다는 평을 받았다. 특히 시에 뛰어나 산천의 명승을 읊은 것이 관동록 關東錄·귀전록 歸田錄에 전한다. 최숙생 ( 崔淑生 ) 등과 친하였다. 예안의 청계서원 ( 淸溪書院 )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송재집1권이 있다.

 

이해(李瀣)

1496(연산군 2) 1550(명종 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보 ( 眞寶 ). 자는 경명(景明), 호는 온계(溫溪). 선산 정()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진사 계양(繼陽)이고, 아버지는 식진사 식()이며, 어머니는 사정 ( 司正 ) 박치(朴緇)의 딸이다. ()의 형이다.

어려서 작은아버지 우( )에게 글을 배워 1525(중종 20)에 진사가 되었고, 152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33년에 사간 · 정언 등을 거쳐 1541년 직제학에 올랐으며, 이어 경상도진휼경차관(慶尙道賑恤敬差官) · 좌승지 · 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544년에 첨지중추부사 · 대사헌 · 대사간 · 예조참판을 지내고, 이해 또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인종이 즉위한 뒤에도 계속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권신 이기(李 咬 )를 우의정에 탁용(擢用 : 발탁하여 등용함)하려는 것을 반대하고 탄핵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이기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1545(명종 즉위년) 강원도관찰사에 이어 1547년에 황해도관찰사, 1549년에 청홍도관찰사를 거쳐 1550년에는 한성부우윤이 되었다. 그러나 명종이 즉위하면서 소윤이 득세하였기 때문에 이기의 심복인 사간 이무강(李無彊)의 탄핵을 받아 무고사건에 연좌된 구수담 ( 具壽聃 )의 일파로 몰리게 되었다.

그 때 주위사람들이 권세에 거짓으로 굴복하면 모면할 수 있다고 권하였으나 거절하였으며, 마침 김안로 ( 金安老 )가 인근에 살았으므로 권세로 이끌려 하였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그러나 명종이 그의 결백함을 알고 특별히 갑산에 귀양보내는 것으로 그쳤지만, 귀양가는 도중에 양주에서 병사하였다. 예서(隷書)에 뛰어났으며 선조 때 벼슬이 환급되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영주의 삼봉서원(三峰書院), 예안의 청계서원 ( 淸溪書院 )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민(貞愍)이다.

 

이황(李滉)

1501(연산군 7) 1570(선조 3). 조선 중기의 문신 · 학자. 본관은 진보 ( 眞寶 ).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 퇴도(退陶) · 도수(陶 馬 ).

생 애경상도 예안현(禮安縣) 온계리(溫溪里 :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좌찬성 식()7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생후 7개월에 아버지의 상()을 당했으나, 현부인이었던 생모 박씨의 훈도 밑에서 총명한 자질을 키워 갔다.

12세에 작은아버지 우( )로부터 논어 를 배웠고, 14세 경부터 혼자 독서하기를 좋아해, 특히 도잠(陶潛)의 시를 사랑하고 그 사람됨을 흠모하였다. 18세에 지은 야당 野塘 이라는 시는 그의 가장 대표적인 글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20세를 전후하여 주역 공부에 몰두한 탓에 건강을 해쳐서 그 뒤부터 다병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한다.

27(1527)에 향시 ( 鄕試 )에서 진사시와 생원시 초시에 합격하고, 어머니의 소원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성균관에 들어가 다음해에 진사 회시에 급제하였다. 33세에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김인후 ( 金麟厚 )와 교유하고 심경부주 心經附註 를 입수, 크게 심취하였다.

이 해 귀향 도중 김안국 ( 金安國 )을 만나 성인군자에 관한 견문을 넓혔다. 34(1534)에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 부정자 ( 副正字 )가 되면서 관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37세에 어머니 상을 당하자 향리에서 3년 간 복상했고, 39세에 홍문관수찬이 되었다가 곧 사가독서 ( 賜暇讀書 )에 임명되었다.

중종 말년에 조정이 어지러워지매 먼저 낙향하는 친우 김인후를 한양에서 떠나 보냈다. 이 무렵부터 관계를 떠나 산림에 은퇴할 결의를 굳힌 듯, 43세이던 10월에 성균관사성으로 승진하자 성묘를 핑계삼아 사가를 청해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을사사화 후 병약함을 구실로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46(1546)가 되던 해 고향인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의 동암(東巖)에 양진암 ( 養眞庵 )을 얽어서 산운야학(山雲野鶴)을 벗삼아 독서에 전념하는 구도 생활에 들어갔다. 이 때에 토계를 퇴계(退溪)라 개칭하고, 자신의 아호로 삼았다.

그 뒤에도 자주 임관의 명을 받아 영영 퇴거(退居)해 버릴 형편이 아님을 알고 부패하고 문란한 중앙의 관계에서 떠나고 싶어서 외직을 지망, 48세에 충청도 단양군수가 되었다. 그러나 곧 형이 충청감사가 되어 옴을 피해 봉임 전에 청해서 경상도 풍기군수로 전임하였다.

풍기군수 재임중 주자가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부흥한 선례를 좇아서, 고려 말기 주자학의 선구자 안향 ( 安珦 )이 공부하던 땅에 전임 군수 주세붕 ( 周世鵬 )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 ( 扁額 ) · 서적 ( 書籍 ) · 학전 ( 學田 )을 하사할 것을 감사를 통해 조정에 청원, 실현을 보게 되었다.

이것이 조선조 사액 서원(賜額書院)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 ( 紹修書院 )이다. 1년 후 퇴임하고, 어지러운 정계를 피해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寒棲庵)을 지어 다시금 구도 생활에 침잠하다가 52(1552)에 성균관대사성의 명을 받아 취임하였다. 56세에 홍문관부제학, 58세에 공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여러 차례 고사하였다.

43세 이후 이 때까지 관직을 사퇴하였거나 임관에 응하지 않은 일이 20여 회에 이르렀다. 60(1560)에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아호를 도옹(陶翁) ’ 이라 정했다. 이로부터 7년 간 서당에 기거하면서 독서 · 수양 · 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들을 훈도하였다.

명종은 예()를 두터이 해 자주 그에게 출사(出仕)를 종용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에 명종은 근신들과 함께 초현부지탄(招賢不至嘆) ’ 이라는 제목의 시를 짓고, 몰래 화공을 도산에 보내 그 풍경을 그리게 하였다.

그리고 그것에다 송인 ( 宋寅 )으로 하여금 도산기(陶山記) 및 도산잡영(陶山雜詠)을 써넣게 해 병풍을 만들어서, 그것을 통해 조석으로 이황을 흠모했다 한다. 그 뒤 친정(親政)하게 되자, 이황을 자헌대부 ( 資憲大夫 ) · 공조판서 · 대제학이라는 현직(顯職)에 임명, 자주 초빙했으나, 그는 그때마다 고사하고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67세 때 명나라 신제(新帝)의 사절이 오게 되매, 조정에서 이황의 내경(來京)을 간절히 바라 어쩔 수 없이 한양으로 갔다. 명종이 돌연 죽고 선조가 즉위해 그를 부왕의 행장수찬청당상경(行狀修撰廳堂上卿) 및 예조판서에 임명하였다. 하지만 신병 때문에 부득이 귀향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황의 성망(聲望)은 조야에 높아, 선조는 그를 숭정대부 ( 崇政大夫 ) 의정부우찬성에 임명, 간절히 초빙하였다. 그는 사퇴했지만 여러 차례의 돈독한 소명을 물리치기 어려워 마침내 68세의 노령에 대제학 · 지경연(知經筵)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무진육조소 戊辰六條疏 를 올렸다.

선조는 이 소를 천고의 격언, 당금의 급무로서 한 순간도 잊지 않을 것을 맹약했다 한다. 그 뒤 이황은 선조에게 정이(程 蓬 )사잠 四箴 , 논어집주 · 주역 , 장재(張載)서명 西銘 등의 온오(蘊奧)를 진강하였다.

노환 때문에 여러 차례 사직을 청원하면서 왕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서 필생의 심혈을 기울여 성학십도 聖學十圖 를 저술, 어린 국왕 선조에게 바쳤다. 이듬해 69세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번번히 환고향(還故鄕)을 간청해 마침내 허락을 받았다.

환향 후 학구(學究)에 전심하였으나, 다음해 70세가 되던 11월 종가의 시제 때 무리를 해서인지 우환이 악화되었다.

그 달 8일 아침, 평소에 사랑하던 매화분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킨 후, 일으켜 달라 해 단정히 앉은 자세로 역책(易 愁 : 학덕이 높은 사람의 죽음)하였다.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폐하여 애도하고, 대광보국숭록대부 ( 大匡輔國崇祿大夫 ) 의정부영의정 겸 경연 · 홍문관 · 예문관 · 춘추관 · 관상감영사를 추증하였다. 장사는 영의정의 예에 의하여 집행되었으나, 산소에는 유계(遺誡)대로 소자연석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 ’ 라 새긴 묘비만 세워졌다.

죽은 지 4년 만에 고향 사람들이 도산서당 뒤에 서원을 짓기 시작해 이듬해 낙성, 도산서원의 사액을 받았다. 그 이듬해 2월에 위패를 모셨고, 11월에는 문순(文純)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학 문이황이 주자대전 을 입수한 것은 중종 38, 즉 그의 43세 때였고, 주자대전 은 명나라 가정간본(嘉靖刊本)의 복각본(復刻本)이었다. 가정간본의 대본(臺本)은 송나라 때 간행된 것을 명나라 때 복간한 성화간본(成化刊本)의 수보본(修補本)이었다.

그가 주자대전 을 읽기 시작한 것은 풍기군수를 사퇴한 49세 이후의 일이었다. 이황은 이에 앞서 이미 심경부주 · 태극도설 · 주역 · 논어집주 등의 공부를 통해 주자학의 대강을 이해하고 있었으나, 주자대전 을 완미(玩味)함으로써 그의 학문이 한결 심화되었고, 마침내 주희의 서한문의 초록과 주해에 힘을 기울였다.

그의 학문이 원숙하기 시작한 것은 50세 이후부터였다고 생각된다. 50세 이후의 학구 활동 가운데서 주요한 것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53세에 정지운 ( 鄭之雲 )천명도설 天命圖說 을 개정하고 후서(後敍)를 썼으며, 연평답문 延平答問 을 교정하고 후어 (後語)를 지었다.

54세에 노수신 ( 盧守愼 )숙흥야매잠주 夙興夜寐箴註 에 관해 논술하였다. 56세에 향약을 기초, 57세에 역학계몽전의 易學啓蒙傳疑 를 완성, 58세에 주자서절요 자성록 을 거의 완결지어 그 서()를 썼다.

59세에 황중거(黃仲擧)에 답해 백록동규집해 白鹿洞規集解 에 관해 논의하였다. 또한 기대승 ( 奇大升 )과 더불어 사단칠정에 관한 질의응답을 하였고, 61세에 이언적 ( 李彦迪 )태극문변 太極問辨 을 읽고 크게 감동하였다.

62세에 전도수언 傳道粹言 을 교정하고 발문을 썼으며, 63세에 송원이학통록 宋元理學通錄 의 초고를 탈고해 그 서()를 썼다. 64세에 이구 ( 李球 )의 심무체용론(心無體用論)을 논박했고, 66세에 이언적의 유고를 정리, 행장을 썼고 심경후론 心經後論 을 지었다.

68세에 선조에게 무진육조소 를 상서했으며, 사잠 · 논어집주 · 주역 ≫ 〈 서명 등을 강의하였다. 또한 그간 학구의 만년의 결정체인 성학십도 를 저작, 왕에게 헌상하였다.

무진육조소 의 내용은, 1조 계통을 중히 여겨 백부인 선제(先帝) 명종에게 인효(仁孝)를 온전히 할 것, 2조 시신(侍臣) · 궁인의 참언(讖言) · 간언(間言)을 두절하게 해 명종궁(明宗宮)과 선조궁(宣祖宮) 사이에 친교가 이루어지게 할 것,

3조 성학(聖學)을 돈독히 존숭해 그것으로서 정치의 근본을 정립할 것, 4조 인군(人君) 스스로가 모범적으로 도술(道術)을 밝힘으로써 인심을 광정(匡正)할 것, 5조 군주가 대신에게 진심을 다해 접하고 대간 ( 臺諫 )을 잘 채용해 군주의 이목을 가리지 않게 할 것,

6조 인주(人主)는 자기의 과실을 반성하고 자기의 정치를 수정해 하늘의 인애(仁愛)를 받을 것 등으로, 시무 6개 조를 극명하게 상주한 풍격(風格) 높은 명문이다.

성학십도 는 제1도 태극도(太極圖), 2도 서명도(西銘圖), 3도 소학도(小學圖), 4도 대학도(大學圖), 5도 백록동규도(白鹿洞規圖), 6도 심통성정도 ( 心統性情圖 ), 7도 인설도(仁說圖), 8도 심학도(心學圖), 9도 경재잠도(敬齋箴圖), 10도 숙흥야매잠도(夙興夜寐箴圖)와 도설(圖說) · 제사 ( 題辭 ) · 규약 등 부수문(附隨文)으로 되어 있다.

1도는 도와 도설이 모두 주돈이(周敦 蓬 )의 저작이며, 2도의 서명 은 장재의 글이고, 도는 정복심(程復心)의 작품이다. 3도의 제사는 주희의 말이고, 도는 소학 의 목록에 의한 이황의 작품이다. 4도의 본문은 주희의 대학경 大學經 일장()이고, 도는 권근 ( 權近 )의 작품이다.

5도의 규약은 주희의 글이고, 도는 이황의 작품이며, 6도의 상도(上圖) 및 도설은 정복심의 저작이고 도는 이황의 작품이다. 7도는 도 및 도설이 모두 주희의 저작이고, 8도는 도 및 도설이 모두 정복심의 저작, 9도에서 잠은 주희의 말이고 도는 왕백(王柏)의 작품이며, 10도의 잠은 진백(陳柏)의 말이고, 도는 이황의 작품이다.

그러므로 제3 · 5 · 10도와 제6도의 중간 하도(下圖) 5개 처는 이황의 독자적인 작품이고, 나머지 17개 처는 상기한 선현들의 저작이다. 그러나 이들 유학 사상의 정수는 이황에 의해 독창적으로 배치되어 서로 유기적으로 관련됨으로써 생명 있는 전체적 체계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이황의 학문은 일대를 풍미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역사를 통해 영남을 배경으로 한 주리적(主理的)인 퇴계학파를 형성해 왔다. 그리고 도쿠가와(德川家康) 이래로 일본 유학의 기몬학파(崎門學派) 및 구마모토학파(熊本學派)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쳐 왔다.

또한, 개화기 중국의 정신적 지도자에게서도 크게 존숭을 받아,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3국의 도의철학(道義哲學)의 건설자이며 실천자였다고 볼 수 있다.

언행록 에 의하면, 조목 ( 趙穆 )이 이덕홍 ( 李德弘 )에게 퇴계선생에게는 성현이라 할 만 한 풍모가 있다. ” 고 했을 때, 덕홍은 풍모만이 훌륭한 것이 아니다. ” 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리고 언행통술 言行通述 에서 정자중(鄭子中)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선생은 우리 나라에 성현의 도가 두절된 뒤에 탄생해, 스승 없이 초연히 도학을 회득(會得)하였다. 그 순수한 자질, 정치(精緻)한 견해, 홍의(弘毅)한 마음, 고명한 학()은 성현의 도를 일신에 계승했고, 그 언설(言說)은 백대(百代)의 후에까지 영향을 끼칠 것이며, 그 공적은 선성(先聖)에게 빛을 던져 선성의 학()을 후학의 사람들에게 베풀었다. 이러한 분은 우리 동방의 나라에서 오직 한 분뿐이다. ”

위에서 밝힌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그가 제자들에게서 성현의 예우를 받는, 한국 유림에서 찬연히 빛나는 제일인자임을 엿볼 수 있게 된다.

계승·평가·연구이황의 학풍을 따른 자는 당대의 유성룡 ( 柳成龍 ) · 정구 ( 鄭逑 ) · 김성일 ( 金誠一 ) · 조목 · 이덕홍 · 기대승 · 김부륜(金富倫) · 금응협(琴應夾) · 이산해 ( 李山海 ) · 정탁 ( 鄭琢 ) · 정유일 ( 鄭惟一 ) · 구봉령 ( 具鳳齡 ) · 조호익 ( 曺好益 ) · 황준량 ( 黃俊良 ) · 이정 ( 李楨 ) 등등을 위시한 260여 인에 이르렀다.

나아가서 그는, 성혼 ( 成渾 ) · 정시한 ( 丁時翰 ) · 이현일 ( 李玄逸 ) · 이재 ( 李栽 ) · 이익 ( 李瀷 ) · 이상정 ( 李象靖 ) · 유치명 ( 柳致明 ) · 이진상 ( 李震相 ) · 곽종석 ( 郭鍾錫 ) · 이항로 ( 李恒老 ) · 유중교 ( 柳重敎 ) · 기정진 ( 奇正鎭 ) 등등을 잇는 영남학파 및 친영남학파를 포괄한 주리파 철학을 형성하게 했으니, 이는 실로 한국 유학 사상의 일대장관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이익은 이자수어 李子粹語 를 찬술해 그에게 성인(聖人)의 칭호를 붙였고, 정약용(丁若鏞)도산사숙록 陶山私淑錄 을 써서 그에 대한 흠모의 정을 술회하였다.

임진왜란 후 이황의 문집은 일본으로 반출되어 도쿠가와가 집정(執政)한 에도(江戶)시대에 그의 저술 114645책이 일본각판으로 복간되어 일본 근세 유학의 개조(開祖) 후지와라(藤原惺窩) 이래로 이 나라 유학 사상의 주류인 기몬학파 및 구마모토 학파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고, 이황은 이 두 학파로부터 대대세세(代代世世)로 신명 ( 神明 )처럼 존숭을 받아 왔다.

기몬학파의 창시자 야마사키(山崎暗齋)는 그를 주자의 직제자(直弟子)와 다름 없다. ” 조선의 일인(一人) ’ 이라 평가하였다. 그리고 그의 고제(高弟) 사토(佐藤直方)그의 학식이 이룬 바는 크게 월등해 원명 제유(元明諸儒)의 유()가 아니다. ” 라고 찬양하였다.

이나바(稻葉默齋)주자의 도통(道統) ’ 에서 주자 이래의 일인(一人) ’ 이라고 존신(尊信)했으며, 구마모토 학파의 시조 오쓰카(大塚退野)만약에 이 사람이 없었다면 주자의 미의(微意)는 불명해 속학(俗學)이 되어 버렸을 것이라 생각된다. ” 고 하였다.

도쿠가와 말기의 요코이(橫井小楠)는 그를 원 · 명시대를 통해 고금절무(古今絶無)의 진유(眞儒) ’ 라 절찬했고, 역시 이 계통에 속하는 막부(幕府) 말 메이지(明治)시대의 구스모토(楠本碩水)명대의 대유(大儒) 설경헌(薛敬軒) · 호경재(胡敬齋)와 명말청초의 육가서(陸稼書) · 장양원(張楊園)과 비교하면 훨씬 탁월하다. ” 고 단언하였다.

마쓰다(松田甲)일선사화 日鮮史話 에 의하면, 요코이의 친구이자 제자로서 메이지 제일의 공신이며 교육 칙어(敎育勅語)의 기초자인 모토다(元田東野)정주(程朱)의 학은 조선의 이퇴계(李退溪)에게 전해졌고, 타이야(退野) 선생이 그 소찬(所撰)주자서절요 를 읽고 초연히 얻은 바 있었으니, 내 지금 타이야의 학을 전해 이것을 금상황제(今上皇帝)에게 봉헌하였다 고 술회했다 한다.

뿐만 아니라, 1926년 중국의 북경(北京) 상덕여자대학(尙德女子大學)에서는 대학의 증축 · 확장기금에 충당하기 위해 성학십도 를 목판으로 복각(復刻)해 병풍을 만들어서 널리 반포(頒布)하였다.

이 때, 중국 개화기의 대표적인 사상가 량치차오(梁啓超)는 찬시(贊詩)를 써 그 제1연에서 아득하셔라 이부자(李夫子) 님이시여 라며 거리낌없이 그를 성인이라 호칭하였다. 다음과 같은 조호익의 말은 이황의 학적 지위를 간결히 표현한 매우 적절한 평가라 볼 수 있다.

, “ 주자가 작고한 뒤 … … ()의 정맥은 이미 중국에서 두절되어 버렸다. 퇴계는 … … 한결같이 성인의 학으로 나아가 순수하고 올바르게 주자의 도를 전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비교할 만한 사람이 없을 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이 만한 인물을 볼 수 없다. 실로 주자 이후의 제일인자이다. ”

1609년 문묘 ( 文廟 )에 종사(從祀)되었고, 그 뒤 그를 주사(主祀)하거나 종사하는 서원은 전국 40여 개 처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의 위패가 있는 도산서원은 제5공화국 때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국비 보조로 크게 보수, 증축되어 우리 나라 유림의 정신적 고향으로서 성역화 되었다.

이황의 학덕은 그의 생시(生時)외 한 · 일 양국의 역사에서 크게 선양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 국제적 규모로 널리 부흥, 재검토되고 있다. 1970년 서울에 퇴계학연구원이 창립되었고, 1972년 퇴계 400주기 기념 논문집 퇴계학연구 가 간행되기 이전부터 발행된 계간 학술지 퇴계학보 20003월 현재로 105집에 이르렀다.

경북대학교에 퇴계연구소가 부설되었는가 하면, 서울과 거의 같은 시기에 일본 동경에 이퇴계연구회가 설립되었다. 대만에도 국립사범대학 안에 퇴계학연구회가 부설되었고, 근래에는 미국의 워싱턴 · 뉴욕 · 하와이에 이퇴계연구회가 조직되었으며, 독일 함부르크 및 본에 퇴계학연구회가 생겼다.

1986년에는 단국대학교에서 퇴계 기념 중앙도서관이 낙성되어 그 안에 퇴계학연구소를 부설하였다. 또한, 국제퇴계학회가 창설되어 1976년 이래로 거의 해마다 한국 · 일본 · 대만 · 미국 · 독일 · 홍콩 등지에서 국제학술회의를 개최, 세계 각 국의 이 방면의 석학들이 회동해 주제 논문을 발표하며 진지한 토론을 거듭해 오고 있다.

 

이돈(李燉)

1568(선조 1) 1624(인조 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보 ( 眞寶 ). 초명은 향(). 자는 광중(光仲), 호는 호봉(壺峰). 아버지는 참봉 원회(元晦)이다. 이공(李珙)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01(선조 3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 · 형조정랑 · 사간원정언 · 사헌부지평 · 사간원헌납을 역임하였으며, 헌납으로 있을 때 정인홍 ( 鄭仁弘 )을 논척하다가 경상도 영해부사로 좌천되었다.

1612(광해군 4)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에 돌아가 형 혁(), 동생 환()과 한방에서 동거하면서 화락(和樂)하게 지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성균관직강이 되었고,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영천군수에 재직 중 병사하였다.

 

이명익(李溟翼)

1617(광해군 9)1687(숙종 1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보 ( 眞寶 ). 자는 만리(萬里), 호는 반초당(反招堂). 증조는 충()이고, 할아버지는 일도(逸道)이며, 아버지는 지형(之馨)이다. 1649(인조 2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검열로 등용되고, 곧 설서가 되었다.

1657년과 이듬해 두 차례에 걸쳐 실록을 태백산·오대산 사고에 각각 봉안하고 돌아왔다. 현종 때 정언 ( 正言 )이 되고, 이어서 지평을 거쳐 사간·집의를 역임하였다.

1675년 승지, 다음해 대사간이 되어 언로(言路)의 기강을 세웠고, 1677년 외직인 충청도관찰사로 나가 세곡(稅穀)의 수송을 편리하게 하는 방법을 시행하게 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덜게 하였다. 또한, 대동법을 시행하여 부역과 세공에 의한 백성들의 피해를 덜게 하였다

 

이휘령(李彙寧)

1788(정조 12)1861(철종 12).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군목(君睦), 호는 고계(古溪). 아버지는 승순(承淳)이며, 어머니는 경주최씨(慶州崔氏)이다. 종가의 지순(志淳)에게 입양하여 이황 ( 李滉 )10세 종손이 되었다.

1816(순조 16) 진사시에 합격, 1821년 동몽교관에 임명되었고,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의금부도사·탁지랑(度支郎동복현감·서산군수·영천군수·밀양부사·청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1851(철종 2) 동래부사를 거쳐 1853년 동부승지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으며, 1855년 돈녕부도정을 거쳐 오위도총부 부총관으로 임명되었으나 사직상소를 올리고 역시 부임하지 않았다.

벼슬살이를 하면서 여가에 학문에도 주력하여 이황의 성리학에 전심, 가학(家學)을 이었다. 또한, 십도집설 十圖集說방경무도사 邦慶舞蹈辭도 지었다. 저서로는 고계집8권이 있다.

 

이만도(李晩燾)

1842(헌종 8)1910. 조선 말기의 학자·독립운동가.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관필(觀必), 호는 향산(響山). 경상북도 예안 출신. 1866(고종 3) 정시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전적에 임명되었다가 병조좌랑에 제수되었다.

이어 사간원정언에 임명되고, 홍문관부수찬으로서 남학교수(南學敎授)를 겸하였다. 또한 대신(문신)으로서 선전관을 겸하기도 하였다.

이 후 부교리·장령·지평· 우통례 ( 右通禮 병조정랑·충청장시도사(忠淸掌試都事교리·응교·사간·집의·중학교수(中學敎授) 등을 역임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명성이 높았다. 또한 시강(侍講) 및 빈대(賓對) 때에 그가 상주하는 말을 고종이 모두 기꺼이 받아들였다고 한다.

1876년 일본대사 구로다(黑田淸隆)가 와서 강화도조약을 체결할 때 최익현 ( 崔益鉉 )이 반대 상소를 올리자,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한목소리로 공격을 하였다. 그 때 집의로서 탄핵문의 문구가 사리에 맞지 않다고 없앴다가 대사헌의 미움을 받아 집의직을 삭탈당하였다.

그 뒤 다시 복직되고, 사성·응교·장악정(掌樂正) 등을 역임하였다. 그 해 가을 양산군수에 제수되어 굶주리는 백성을 보살피고 탐관오리를 소탕하는 데 공을 세웠다. 1878년 다시 집의에 임명되어 홍문관·사헌부·사간원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1882년 통정대부에 올라 곧 공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하였다. 세상이 어수선해지자 벼슬길을 단념, 동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 백동(柏洞)에 작은 서재를 지어 놓고 경서를 연구하며 날을 보내다가,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예안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1905년 강제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의 매국죄를 통렬하게 공박하는 소를 올렸다. 1907년 순종이 즉위한 뒤 가선대부에, 1910년 자헌대부에 승자되었다. 그 해 8월 일제에 의해 한국이 병탄되자 유서를 지어 남긴 뒤 단식 24일 만에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이중언(李中彦)

1850(철종 1)1910. 조선 말기의 의병장. 본관은 진보 ( 眞寶 ). 아명은 문석(文錫). 자는 중관(仲寬). 호는 동은(東隱). 경상북도 안동 출신.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만우(晩佑)이며, 어머니는 의성김씨(義城金氏)로 진두(鎭斗)의 딸이다.

1879(고종 16) 문과에 급제한 뒤 상의원직장(尙衣院直長성균관전적·사간원정언을 역임하고, 1880년 사헌부지평 등을 지냈다. 1882년 정국이 혼란하자 봉화의 임당산(林塘山)에 들어가 농사를 지었다. 18958월 일제에 의하여 명성황후시해가 자행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김도현 ( 金道鉉 )이 안동·영양 등지를 중심으로 창의하자 이에 가담하여 전방장으로 활약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을사오적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상소하였으나 간신배들에 의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의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집 밖에 좁다란 방 한칸을 마련하고 외부와 접촉을 끊고 때때로 을사조약 체결 때 상소하였던 글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고, 선조의 사당과 묘를 참배한 뒤 수십일 식음을 전폐하였다.

이무렵 일본경찰 몇 명이 와서 음식을 먹도록 권하라고 식구들을 협박하자, 때마침 베개를 의지하고 졸고 있다가 벌떡 일어나 벼락같은 호령을 하고나서, 머리를 빗고 의관을 정제하고 똑바로 앉아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이명우(李命羽)

애국지사(愛國志士)로 유명하다.

 

이활(李活)

1904 1944. 시인 · 독립운동가. 본관은 진성(眞城). 경상북도 안동 출신. 본명은 원록(源綠) 또는 원삼(源三). 원삼은 주로 가정에서만 불렀다고 한다. 개명은 활(), 자는 태경(台卿). 아호 육사(陸史)는 대구형무소 수감번호 이육사(二六四) ’ 에서 취음한 것이다.

작품 발표 때 육사 二六四(이육사) ’ 및 활()을 사용하였다. 아버지는 황()13대 손인 가호(家鎬)이며, 어머니는 허길(許吉), 5형제 중 둘째 아들이다.

어려서 할아버지에게 한학을 공부하였고, 영천 소재의 옛 백학서원(白鶴書院)인 백학학교(白鶴學校)와 보문의숙(普文義塾) · 교남학교 ( 嶠南學校 )를 다니고 1926년 북경 조선군관학교, 1930년 북경대학(北京大學) 사회학과에 적을 둔 적이 있다 하나, 그 연도나 사실 여부가 확인된 것이 아니다.

경력은 항일운동가로서의 활약이 두드러지는데, 1925년에 형 원기(源琪), 아우 원유(源裕)와 함께 대구에서 의열단 ( 義烈團 )에 가입하였다.

1927년에는 장진홍 ( 張鎭弘 )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이밖에도 1929년 광주학생운동, 1930년 대구 격문사건(檄文事件) 등에 연루되어 모두 17차에 걸쳐서 옥고를 치렀다.

중국을 자주 내왕하면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3년 가을 잠시 서울에 왔을 때 일본 관헌에게 붙잡혀, 북경으로 송치되어 19441월 북경 감옥에서 작고하였다.

문단 활동은 조선일보사 대구지사에 근무하면서 193013일자 조선일보 에 시작품 별건곤 別乾坤 에 평문 대구사회단체개관 大邱社會團體槪觀 등을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뒤 1935신조선 新朝鮮 춘수삼제 春愁三題 · 황혼 黃昏 등을 발표하면서 그의 시작 활동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그 뒤 신조선 · 비판 批判 · 풍림 風林 · 조광 朝光 · 문장 文章 · 인문평론 人文評論 · 청색지 靑色紙 · 자오선 子午線 등에 30여 편의 시와 그밖에 소설 · 수필 · 문학평론 · 일반평문 등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생존시에는 작품집이 발간되지 않았고, 1946년 아우 원조(源朝)에 의하여 서울출판사에서 육사시집 陸史詩集 초판본이 간행되었다.

대표작으로는 황혼 · 청포도 靑葡萄 (문장, 1939.8.) · 절정 絶頂 (문장, 1940.1.) · 광야 曠野 (자유신문, 1945.12.17.) · (자유신문, 1945.12.17.) 등을 꼽을 수 있다.

그의 시작세계는 크게 절정 에서 보인 저항적 주제와 청포도 등에 나타난 실향 의식(失鄕意識)과 비애, 그리고 광야 에서 보인 초인 의지(超人意志)와 조국 광복에 대한 염원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의 생애는 부단한 옥고와 빈궁으로 엮어진 행정(行程)으로, 오직 조국의 독립과 광복만을 염원하고 지절(志節)로써 일관된 구국투쟁은 민족사에 큰 공적으로 남을 것이다.

한발 재겨디딜 곳조차 없는 내 골 과 같은 육사의 의식 공간은 항시 쫓기고 있는 불안한 마음의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빼앗긴 조국에 대한 망국민의 비애와 조국광복에 대한 염원을 그의 시에 새겨놓은 것이다.

1968년 시비가 안동에 건립되었다. 유저로 육사시집 외에, 유고(遺稿) 재첨가본 광야 (1971), 그의 시와 산문을 총정리한 광야(曠野)에서 부르리라 (1981) · 이육사전집 (1986) 등이 있다.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진성·진보 이씨(眞城·眞寶李氏)는 남한에 총 14,428가구, 58,87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李滉(이황) 선생의 일화.

1

退溪(퇴계)의 매화 사랑.        

이황은 연꽃을 사랑했던 중국의 도연명이나 국화를 사랑했던 주돈이와 비교해 결코 뒤지지 않는 애정을 매화에게 보여준 사람이었다. 그는 도산서원 뜰 한구석에 매화를 심어 놓고 달이 기울도록 꽃나무 곁을 돌면서 그 향기와 성품을 즐겼고 벗했다고 한다.

 

언제나 매화를 가까이했던 이황은 말년에 몸이 병들자 자신의 깨끗하지 못한 모습을 매화에게 보여줄 수 없다하며 매화를 다른 곳으로 옮겨 심게 했고, 유언으로 매화분에 꼭 물을 주라는 한 마디 만을 남겼다고도 하니, 매화에 대한 그의 사랑과 흠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는다.

 

2

      더럽히지 않는 거처

단양군수였던 이황이 군수 직을 마치고 관아를 떠나자 아전이 관사를 새로 도배하려고 들어갔다.
그러나 관사는 너무나 깨끗하였으며 장지가 어제 바른 듯 깨끗하고 투명했으며 다시 도배할 필요가 없었다.

그것을 보고 백성들이 크게 기뻐했다.
도학자에 관한 온갖 소문보다, 난해한 학설보다 이 한 가지 일화에서 이황의 진면목을 알아볼 수 있다.
[소인은 더러워져도 닦을 줄 모르고 덮어버리려 하는데, 도학자는 거처하는 곳을 늘 이렇게 깨끗하게 관리하니, 그분의 마음 또한 이렇게 깨끗할 것이다.]하고 다시 한 번 선생을 흠모 했다고 한다.

 

 

3

공지천의 공지어

한 때 춘천박씨의 외손인 이황이 춘천 지방에 곳에 머물고 있었던 일이 있었는데, 하루는 이곳 친구들과 공지천에 천렵을 가서 물고기를 잡으려 했으나 고기가 잡히지 않았다.
그랫더니 이황이 짚을 썰어서 곰짓내 〔 공지천 〕 에 내던졌더니 그것이 전부 진어(珍魚)인 공지어로 되어서 모두 그 고기를 잡아 맛있게 먹으며 잘 놀았다고 한다.

 

4

둘째 부인 권씨의 일화

퇴계선생의 부인 권씨는 우매한 숙맥이었는데 제삿날, 제상에 가득한 음식을 보고 이황에게 밤을 한 개만 집어달라고 하였다. 제를 모시기 전이었는데 이황이 밤을 선뜻 밤을 집어주니 문중 어른이 예에 어긋난다고 나무랐다.

그러자 이황은
“ 어리석은 손부에게 조상께서 밤 한 개쯤 주시니 너그럽게 봐주시지 않겠느냐. ” 고 하였다.

한번은 권씨부인이 이황의  두루마기를 새로 지어왔는데 양 소매의 길이가 맞지 않고 품도 안 맞았다.
게다가 동정에는 밥풀까지 달려 있어 도저히 입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이황은 어이가 없어 아무 말 없이 웃고 나서는 그냥 그 두루마기를 입고 다녔다고 한다.

 

5

        도둑을 만난 퇴계

이황이 32세 때 서울에서 과거를 보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있었던 일이다. 길가 마을 집에서 묶었는데, 한 밤중에 그 집에 도둑이 들었다.
[가진 물건을 모두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모조리 죽여 버릴 테다.!] 두둑의 우두머리인 듯 한 사나이가 칼을 빼 들고 호통을 쳤다. 같이 묵던 일행이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했으나, 퇴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니, 다른 놈들은 우리가 무서워서 벌벌 떠는데, 이 약골로 생긴 놈만은 그런 빛이 없으니 넌 우리가 무섭지 않느냐?]고 두둑의 우두머리가 퇴계에게 물었다.
[나에게 잘못이 없는데 어찌 사람이 사람을 무서워하겠나.] 퇴계는 태연히 대답하였다.
[뭐라고, 가만 보니 이놈은 보통 놈이 아닌걸. 그렇지, 사람이 사람을 무서워할 필요는 없지. 하지만 칼을 쥐고 있는데도 무섭지 않는가?]
[내 본디 가진 것이 없고, 또 그대들과 원수진 바가 없으니, 나를 해치기야 하겠나! 보아하니 그대들도 부모와 처자가 있는 몸인 듯한데, 부모에게 효도는 못할망정 마음 아프게 해 드려서야 되겠는가. 사내대장부가 뭘 못해 나그네의 보따리나 털고 다닌단 말인가!]
[누군 이 짓을 하고 싶어 하는 줄 아시오. 벼슬아치들 등살에 더 이상 살 수 없어서 이 짓이 아니오.]
[그럼 벼슬아치들 것이나 빼앗지 어째서 죄 없는 백성들의 것을 빼앗으려 드오. 그리하면 그 못된 벼슬아치들과 무엇이 다르오.]

서슬이 시퍼래서 칼을 휘두르며 호통을 치던 도둑들은 퇴계의 조리 있는 말에 그만 기가 꺾이고 어름어름 그 자리를 피해 달아나 버렸다고 한다.

 

6

  퇴계의 유품.

이황 퇴계선생께서 임종하실 무렵 아들을 불러놓고 문갑 속에서 캐캐 묵은 조그마한 주머니 하나를 꺼내 건네주면서 유언하기를
<네가 이 주머니를 항시 몸에 지니되 일생을 통해서 살아가는 동안 불의의 재난을 당하거나 그 외 어떠한 여건으로 인해서 도저히 죽음에서 탈피하지 못할 난관에 봉착되거든 이 주머니를 풀어 보아라. 만일 그러한 난관이 없거든 네가 또 다시 임종을 하더라도 절대 이 주머니는 열어 보지 말고 오늘 내가 너에게 유언한 것처럼 네가 너의 자식에게 유언을 하여 물려주도록 하라>는 분부를 남긴 채 임종을 하였다.

유언과 더불어 주머니를 물려받은 아들은 그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대 현인이신 선친의 각별한 유언이며 또 꼭꼭 묶여있는 주머니를 하시를 막론하고 생명의 보주처럼 몸에 간직하면서 살아갔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역시 임종할 때까지 그러한 위급한 난관이 없었다. 그리하여 일생 동안 궁금증을 품으면서 간직했던 주머니였지만 한번도 풀어보지 못하고 그대로 또 자기의 아들에게 유언과 함께 물려주게 되었다. 이로서 주머니는 벌써 삼대 째 이르게 되었다.
삼대 째인 손자 역시 그러한 난관이 없었으므로 또 그 다음으로 이어져 갔다.
이렇게 하여 그 주머니는 한번도 풀어 보지 못한 채 대대로 이어져 어느덧 칠대 손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칠대 손 역시 조상으로부터 한 번도 풀러진 일이 없는 이 주머니를 마찬가지로 생명처럼 여기며 항시 몸에 지니게 되었다. 그런데 한번은 이 칠대 손이 어디를 가느라고 험준한 산길을 걷게 되었다.

때마침 길가 숲 속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무의식중에 놀란 칠대 손이 그곳을 달려가 보니 어떤 사나이가 목에 칼이 꽂힌 채 죽어 있었다. 그는 당황하여 사람 살리라고 고함을 질렀다. 그 길은 험준(險峻)하고 깊은 산중이라 산적들이 때때로 나타나서 인명을 살해한 일이 있으므로 때마침 관가에서 포졸들을 풀어 수색 중에 있었다.
사람 살리라는 고함소리를 듣고 달려온 포졸들은 현장을 목격한 뒤 이 칠대 손을 살인자로 단정하고 관가로 압송하여 투옥시켜 버리고 말았다.

요즈음 같으면 은 살인자라도 동기를 파악하여 죄의 경중에 따라 재판을 하여 처벌을 하지만, 옛날에는 <살인자(殺人者)는 세(殺)>라 하여 그대로 살인자의 누명을 씌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는 일도 없지 않았다.

그는 드디어 사형 집행일이 되어 사형대에 끌려 나가기에 이르렀다. 당시에 죽이고 살리는 권한을 가졌던 고을 원님이 관아로 나와 사형수에게 마지막 유언을 물었다. 칠대 손은 대대로 전해진 주머니에 대한 생각이 떠올라서, 그 연유를 낱낱이 고하며 자초지종을 이야기 하였다.

원님이 말하기를
<지금도 그 주머니를 가지고 있느냐 ?> 물었다.
< 네 그러 하옵니다. >라고 대답 하자마자 이 어찐 일인가? 원님이 서있던 누각 대들보가 벼락 치는 소리를 내면서 부러져 내려앉았다.

간신히 죽음을 모면한 원님은 칠대손이 내미는 주머니를 받아 열어보니 그 속에는 꼬깃꼬깃 접은 손바닥만한 백지한 장이 들어있었다. 자세히 펼쳐보니 글 한 구절이 쓰여 있었는데 그 글의 내용은 <오활여압량사(吾活汝壓樑死)하니 <여활오칠대손(汝活吾七代孫)하라.>는 기적 같은 내용이었다.

그 글의 뜻은,
< 나는 네가 대들보에 깔려 죽을 것을 살려주니 너는 나의 칠대 손을 살려 달라.>라는 내용이었다. 이 글을 읽어본 원님은 모골이 숙연한 채 즉석에서 무릎을 치며 큰소리로 외치기를 <과연 명현이로다. 그 조상과 그 자이여! 어찌 이와 같으리요. >하고 탄성을 지르며 일언지하에 칠대 손을 무죄 석방했다는 이야기가 전설로 전해지고 있다.

 

7

權轍(권철)정승과 퇴계

雙翠軒(쌍취헌) 權轍(권철)정승은 선생과 동시대의 대학자로서, 明宗(명종) 때에 領議政(영의정) 벼슬까지 지낸 名賢(명현)이다.
그는 임진왜란 때에 幸州山城(행주산성)에서 적을 크게 격파하여 萬古名將(만고명장)의 이름을 떨친 權慄(권율)장군의 아버지며 또한 宣祖(선조) 때의 名宰相(명재상)이었던 白沙(백사) 李恒福(이항복)의 장인이기도 하다.

權轍(권철)정승은 사람을 알아보는 식견이 남달리 투철하여, 不汗黨(불한당)이나 다름없는 소년 이항복의 사람됨을 알아보고서 온 문중이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혼자 우겨서 그를 사위로 삼은 유명한 일화를 지닌분이다. 그처럼 식견이 탁월한 權轍(권철)정승이 퇴계선생의 학문에 대해 관심이 없을 리가 없었다.

권철정승은 영의정으로 재직할 때, 평소에 그리던 선생을 만나보고자 몸소 퇴계선생을 찾아간 일이 있었다. 당시의 관례로서는 있기 어려운 일이었으나 권철정승이 학문을 좋아하고 만민을 평등시하는 넓은 식견으로 대학자인 선생을 친히 방문했던 것이다.
퇴계선생이 예의를 갖추어 영의정 권철을 영접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하여 두 학자는 기쁜 마음으로 학문을 토론하고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그런데 거기까지는 좋았으나 그 다음 식사 때가 큰 문제였다. 식사 때가 되자 저녁상이 나왔는데 밥은 보리밥에다가 반찬이라고는 콩나물국과 가지 잎 무친 것과 산채 뿐으로, 고기 부치라고는 북어 무친 것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선생은 평소에도 제자들과 똑같이 그런 식사를 해왔는데, 상대방 손님이 영의정임에도 불구하고 평소와 다름없는 식사를 내왔던 것이다. 평소에 먹던 음식과 너무나 달라 영의정 권철에게는 보리밥과 소찬이 입에 맞을 리가 없었다. 권철정승은 몇 숟갈 뜨는 척 하다가 그대로 상을 물려 버렸다.

그러나 선생은 모른척하고 다음날 아침에도 그와 똑같은 음식을 내 놓았다. 권철정승은 이날 아침에도 그 밥을 먹어낼 수가 없어서 어제 저녁과 마찬가지로 몇 숟갈 떠먹고 나서 상을 그냥 물려 버렸다.
주인이 선생이 아니라면 밥투정이라도 했겠지만 상대가 워낙 학덕이 높은 退溪(퇴계)이고 도한 퇴계선생이 그 밥을 아무 말없이 드시는 것을 보니, 음식이 아무리 마땅치 않아도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사태가 그렇게 되고 보니 권철정승은 더 묵어가고 싶어도 식사가 입에 맞지 않아 더 묵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예정을 앞당겨 다음 날은 부랴부랴 떠날 수밖에 없었는데, 권철정승이 작별을 하려 할 때 선생에게
[이렇게 찾아뵙고 떠나게 되니 매우 반갑소이다. 우리가 만났던 것을 깊이 기념하고자 하니 선생은 좋은 말씀을 한마디만 남겨 주시지요.]
[村夫(촌부)가 대감 전에 무슨 말씀을 여쭐 것이 있겠나이까. 대감께서 모처럼 말씀하시니 제가 느낀 점을 한 말씀만 솔직히 여쭙겠나이다.]

선생은 그렇게 전제하고 옷깃을 바로 잡으며 다시 입을 열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대감께서 원로에 누추한 곳을 찾아 오셨는데 제가 융숭한 식사대접을 못해 매우 송구스럽습니다. 그러나 제가 대감 전에 올린 식사는 일반 백성들이 먹는 식사에 비기면 더할 나위 없는 성찬이었고, 백성들이 먹는 음식은 꽁보리밥에 된장찌개가 고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감께서는 그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제대로 잡수시지 못하는 것을 보고 저는 이 나라의 장래가 은근히 걱정스럽습니다. 무릇 정치의 要諦(요체)는 與民同樂(여민동락)에 있사온데, 관과 민의 생활이 그처럼 동떨어져 있으면 어느 백성이 관의 행정에 마음으로 복종하겠나이까?]
그 말은 폐부를 찌르는 듯한 충언이었다. 선생이 아니고서는 영의정에게 감히 말할 수 없는 直諫(직간)이었다
권철정승은 그 말을 듣고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수그렸다.
[참으로 선생이 아니고서는 누구에게도 들어볼 수 없는 좋은 말씀입니다. 나는 이번 행차에서 깨달은 바가 많아 돌아가면 선생의 말씀을 잊지 않고 실천에 옮기도록 노력하겠나이다.]

영의정 권철은 크게 깨달은 바 있어 선생의 충고를 거듭 고마워하였다. 그런 말을 영의정 앞에서 스스럼없이 하는 퇴계선생도 위대하지만, 그런 대접과 충고를 충심으로 받아드릴 수 있는 권철정승의 도량과 인격도 또한 퇴계 못지 않은 대단하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서울로 돌아간 권철정승은 돌아오자 만조백관들을 불러놓고 선생의 말을 전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도 그날부터 생활을 일신하여 지극히 검소한 일생을 보냈다고 한다.

 

8

퇴계의 독서법

退溪(퇴계)선생의 독서법 선생은 어려서부터 글읽기를 무척 좋아하여 늘 책을 멀리한 일이 없었다. 그리고 책을 읽을 때면 자세를 바르게 하고 앉아서 온갖 정성을 모두 기울였다.
아무리 피로해도 책을 누워서 읽거나 혹은 흐트러진 자세로 읽은 일이 한번도 없었다. 그처럼 근엄한 독서 자세는 어려서부터 70세에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조금도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퇴계는 책을 남달리 精讀(정독)하는 편이며 무슨 책이나 읽기 시작하면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다시 읽어, 그 책 속에 담겨 있는 참뜻을 완전히 터득하기 전에는 그 책을 결코 내려놓지 않았다.

공자(孔子)는 주역(周易)을 삼천 번이나 읽느라고 가죽으로 묶은 끈이 세 번씩이나 끊어졌다는 고사(故事)가 있는데, 선생의 독서법도 바로 그와 같은 것이었다.
일찍이 선생은 서울에서 유학 할 때 주자전서(朱子全書)를 처음으로 대하게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그는 방문을 굳게 닫고 방안에 조용히 들어앉아 그 책을 읽기 시작하자, 하루에 세 번씩 식사 때 이외에는 일체 외출을 안하고 그 책 한 질만을 수없이 되풀이하여 읽었다.

그 해 여름은 몹시 무더워서 보통 사람들은 독서는 커녕 서늘한 나무 그늘을 찾아다니기에 바쁠 지경이었건만 선생은 그와 같은 暴暑(폭서)도 아랑곳없이 방문을 굳게 닫은 채 줄곧 독서만 했던 것 이다.

한 친구가 선생의 건강을 걱정한 나머지 찾아와서
[이 사람아! 이 같은 무더위에 방문을 닫고 앉아 독서만 전념하다가는 반드시 건강을 해치게 될 것일세. 독서는 좀 시원해 졌을 때 하기로 하고, 이 여름에는 산수 좋은 곳으로 避暑(피서)라도 다녀오도록 하세!] 하고 충고한 말이 있었다.

그러자 선생은 조용히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한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가슴속에 시원한 기운이 감도는 듯한 깨달음이 느껴져서 더위를 모르게 되는데 무슨 병이 생기겠는가. 이 책에는 무한한 진리가 담겨져 있어서, 읽으면 읽을수록 정신이 상쾌해 지며 마음에 기쁨이 솟아오를 뿐이네!] 그리고 선생은 이어서 이렇게도 말하였다.
[이 책의 原註(원주)를 읽어보고 나는 학문하는 방법을 알 수 있게 되었고, 그 방법을 알고 나니 이 책을 읽는데 더욱 흥이 일어나네. 이 책을 충분히 터득하고 나서 四書(사서)를 다시 읽어보니 성현들의 한 말씀 한 말씀에 새로운 깨달음이 느껴져서 나는 이제야 학문하는 길을 제대로 알게 된 것 같네.]라고 하였다.

어느 제자 한 사람이 글을 올바르게 읽는 법을 물었더니 선생은 즉석에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글이란 정신을 차려서 수없이 반복해 읽어야 하는 것이다. 한두 번 읽어보고 뜻을 대충 알았다고 해서 그 책을 그냥 내버리면 그것이 자기 몸에 충분히 베지 못해서 마음에 간직할 수가 없다. 이미 알고 난 뒤에도 그것을 자기 몸에 베도록 공부를 더해야만 비로소 마음속에 길이 간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야만 학문의 참된 뜻을 체험하여 마음에 흐뭇한 맛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또 독서에 대해 다음과 같이도 말했다.
[글을 읽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반드시 성현들의 말씀과 행동을 본받아서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경지에까지 도달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서둘러 읽어서 그냥 넘겨 버리면 그 책을 읽기는 했어도 별로 소득은 없게 되는 것이다.]

실로 독서의 진수를 정확하게 지적한 金言(금언)이라 하겠다. 우리 모두 선생의 독서법을 본받아 精讀(정독)하고 반복하여 읽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 좋겠다.

 

9

제자입문(비상한 관찰력)

선생이 도산서당에서 많은 제자들을 길러내어 학자로서의 그의 명성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을 때의 일이었다. 하루는 星州(성주)에서 두 젊은이가 제자로 입문하고자 도산서당으로 선생을 찾아 왔다.

한 사람은 寒岡(한강) 鄭逑(정구)요, 다른 한 사람은 萊菴(래암) 鄭仁弘(정인홍)이었다. 선생이 그들을 만나 보니, 마침 몹시 무더운 날씨였건만 그들은 스승에게 대한 예의를 갖추느라 도포에 행건 까지 치고 왔었다. 인사가 끝나고 이야기를 나누게 되자, 정구는 [에이 더워, 선생님! 더워서 도포를 좀 벗겠습니다. ] 라고 말한 뒤에 도포를 훨훨 벗어서 벽에 걸고 갓까지 벗어 놓더니 수건으로 땀을 닦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행동이 스스럼없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정인홍은 그와 반대로 도포와 갓을 벗어붙이기는커녕 찌는 듯한 더위에도 불구하고 그린 듯이 정좌를 하고 앉은 채 눈썹 한 개도 까딱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극단적으로 대조적인 두 사람의 인품이었다.
학문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에도 그들의 대조적인 성품은 그대로 나타나 있어서 정구는 텁텁하면서도 천진스러운 면이 있는 반면에, 정인흥은 말 한마디 한마디가 자로 잰 듯이 이론이 정연하여 하나도 책잡을 데가 없었다.

선생은 담화를 나누며 그들의 인품을 세밀히 관찰하고 나서, 그들을 농운정사로 가서 쉬라고 일렀다. 농운정사란 도산서원에 있는 제자들이 숙식하는 건물이다.

두 사람이 농운정사로 물러간지 얼마 후에, 선생은 동자를 불러 이렇게 명하였다. [너 농운정사에 가서 오늘 찾아온 두 젊은이가 지금 어떤 모양으로 쉬고 있는지 자세하게 알아보고 오너라.] 동자는 잠시 후에 다녀와서 [제가 가 보았더니 정구라는 사람은 더워서 못 견디겠다고 하면서 웃통까지 벗어붙이고 우물가에서 씻고 야단법석인데, 정인홍이라는 사람은 옷을 조금도 흩트리지 않은 채 깎아 놓은 부처님처럼 지극히 단정한 자세로 방안에 앉아 있습니다.]
[그래 알았다. 수고가 많았다. 물러가거라]

다음날 아침 두 사람은 정식으로 제자로 입문하는 예식을 갖추려고 幣帛(폐백)을 가지고 선생 앞에 다시 나타났다. 옛날에는 제자로 입문하려면 疋木(필목)이나 그 밖의 물품을 가지고 와서 스승에게 큰절을 올리며 폐백을 드리는 것이 격식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선생은 먼저 정구의 큰절과 폐백을 받음으로써 그를 제자로 삼기를 허락하였다. 그러나 정인홍의 차례가 오자, 선생은 손을 들어 큰절과 폐백 올리기를 거절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대에게는 아무것도 가르칠 것이 없으니, 그대는 그냥 돌아가 주기를 바라네. 그대를 가르치기에는 나는 힘이 부족한 사람이야.] 이리하여 정인홍에게는 제자 입문을 거절하고 그냥 돌려보냈다.


다른 제자들이 그 광경을 목격하고 정인흥이 돌아간 뒤에 선생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선생은 조용히 [내가 두 사람의 거동을 살펴보니 정구는 시종일관하게 常情(상정)에 따라 행동했지만, 정인홍은 하나에서 열까지 상정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고 있었다. 상정을 벗어난 행동을 하는 사람은 언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데, 그런 사람이 무슨 쓸모가 있다고 글을 가르치겠느냐.]

그 당시 제자들은 그 말을 무심코 들어 넘겼다. 그러나 먼 뒷날에 보면 선생의 예언은 너무도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선생에게서 입문을 거절당한 정인홍은 그후 南冥(남명) 曺植(조식)의 제자로 입문하여 대학자가 된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벼슬이 높아지자 그는 사색당쟁의 주동자로서 鄭澈(정철), 尹斗壽(윤두수), 柳成龍(류성룡) 같은 조정의 충신들을 모조리 탄핵하여 조정을 크게 어지럽히다가 급기야는 癸丑獄事(계축옥사)까지 일으켜 永昌大君(영창대군)을 蒸殺(증살)하게까지 하였다.

그와 같이 불의의 영화를 누려가며 갖은 폐단을 부리다가 마침내 仁祖反正(인조반정) 때에 斬刑(참형)을 당하고 가산까지 籍沒(적몰)되었다.
이로 인하여 정인홍의 선생인 조남명도 慘酷(참혹)한 追刑(추형)을 받았었다. 그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면 사람을 판단하는 선생의 눈이 얼마나 정확했는가를 가히 알 수 있는 것이다.

 

10

악법도 법이니 지켜야 한다.

선생께서 50세 때 살고 있던 곳은 陶山面(도산면) 霞明里(하명리)였다. 지금은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어 廢校(폐교)가 된 陶山(도산)초등학교가 있던 곳이 바로 선생이 살았던 옛 집터였다.

그 집 앞에는 洛東江(낙동강)이 흐르고 있는데, 예로부터 낙동강에는 銀魚(은어)가 많았다. 銀魚(은어)는 맛이 좋은 물고기며, 특히 낙동강의 은어는 맛이 더욱 좋아 임금님에게 진상하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나라에서는 누구를 막론하고 백성들은 은어를 잡아먹으면 안 된다는 것을 법으로 정해 두었다. 그러나 철없는 아이들은 국법을 알 리가 없어서 강에 멱을 감으러 나가면 저마다 법을 어겨가며 은어를 잡았다. 그 아이들 중에는 선생의 자제들도 있었다.

선생은 아이들이 은어를 잡아오는 광경을 볼 때마다
[국법을 어겨서는 안 된다.]라고 꾸짖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村老(촌로) 한 분이 선생을 보고 이렇게 나무랐다.
[여름철에 아이들이 물놀이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물 속에서 멱을 감다보면 물고기도 잡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데, 아이들이 은어를 잡는 것이 뭐가 나쁘다는 말씀이요. 나쁘다면 아이들이 나쁜 것이 아니라 그런 부자연스러운 법을 만들어 놓은 나라가 나쁘다고 나는 생각하오]
선생은 그 항의에 솔직히 수긍을 하면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노인장의 말씀은 지극히 옳으신 말씀입니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행동에 제재를 가하는 그런 법은 확실히 잘못된 국법입니다.
그러나 악법(惡法)도 법임에는 틀림이 없으니, 나라에서 일단 법으로 제정한 이상 백성 된 자라면 마땅히 그 법을 지켜 나가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악법이라고 해서 지켜 나가지 않으면, 나중에는 준법정신이 헤이해 져서 좋은 법도 지키지 않게 될 것이니 그렇게 되면 나라의 안녕 질서를 무엇으로 유지해 나가겠습니까. 아무리 악법이라도 나라에서 법으로 제정한 이상에는 누구나 반드시 지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천금같이 귀한 말이었다.

일찍이 희랍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임에는 틀림이 없다고 갈파하면서 악법에 의하여 사약을 마시고 조용히 세상을 떠난 일이 있거니와, 준법사상이 준열한 점에 있어서 퇴계는 소크라테스와 완전히 일치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타일러도 아이들은 말을 듣지 아니하고 여전히 낙동강에서 은어를 잡고 있었으므로 선생은 집안 아이들이 날마다 국법 어기는 것을 차마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서 마침내 낙동강에서 멀리 떨어진 竹洞(죽동)으로 집을 옮겨 버리고 말았다.

어린 아이들이 법을 어기지 않도록 환경을 바꾸어 버린 것이다.
선생의 學行一致(학행일치)의 높은 정신은 이런 곳에서도 엿볼 수 있다.

 

11

정직(밤알 되돌려 주기)

선생이 서울에 계실 때, 지금의 서소문인 [학다리]에 살았는데 옆집과는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옆집 담 안에는 수십 년 묵은 밤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여름철이면 그 밤나무 가지가 선생 댁 마당에 뻗어서 좋은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따라서 가을철에 밤이 익으면 그 밤알이 선생댁 마당에도 수없이 떨어졌다.

선생은 아침이면 일찍 일어나 산책을 나가는 버릇이 있었는데 뜰에 남의 집 밤이 떨어진 것을 보면 한 알도 남기지 아니하고 모조리 주워서 담 너머로 주인집에 던져주곤 하였다. 어떤 때에는 밤을 손수 주워 주인에게 돌려주느라고 아침 산책을 가지 못할 때도 있었다.

옆집 주인으로 보면 미안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옆집 사람은 어느 날 약간의 밤을 선물로 가지고 찾아 와서 선생에게
[선생께서 아침마다 밤을 주워 저의 집에 보내 주셔서 고맙고도 미안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실상인즉 저의 집에서는 저의 집 마당에 떨어진 밤만 가지고도 온 식구가 충분히 먹고도 남으니 내일부터는 선생댁 마당에 떨어진 밤은 저의 집에 보내지 마시고 댁에서 아이들에게 나눠주도록 하시옵소서.]하였다.

이웃 간의 인정으로써는 있을 법 한 일이었다. 그러나 선생은 조용히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말씀하신 뜻은 대단히 고맙습니다만 남의 집 과실을 어찌 함부로 먹을 수 있겠습니까. 내 소유가 아닌 물건은 비록 내 마당에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주인에게 돌려드려야 옳을 것이오. 노형께서 그런 말씀을 했다고 해서 내 마당에 떨어진 남의 집 밤을 아이들에게 함부로 나눠 먹이면 아이들은 그런 일에 습성이 생겨서 나중에는 어떤 잘못을 범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오.]

그렇게 일단 공손히 거절하고 나서, 선생은 다시 이렇게 말했다.
[그러잖아도 우리 집 식구들은 그 밤나무의 신세를 많이 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다가 그 밤나무의 열매까지 우리가 얻어 먹는다면 너무도 염치없는 일 일것이요.]

옆집 사람은 그 말씀을 듣고 깜짝 놀라며 반문한다.
[선생댁에서 저의 집 밤나무의 신세를 진다고 그게 무슨 말씀이 십니까?]
선생은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우리집 식구들에게는 그 밤나무의 신세가 이만저만이 아니라오. 그 밤나무가 여름의 우리집 마당에 시원한 그늘을 지어 주어서 오뉴월 삼복더위에도 우리집 식구들은 더위를 모르고 시원하게 지낼 수 있으니 그것이 첫째 신세요, 둘째는 내가 아침마다 뜰에 나가 밤을 주워 담 너머로 던져드리느라고 허리를 폈다 굽혔다 하다보니 운동이 되어서 몸이 건강하게 되었으니 그 얼마나 고마운 신세요.]

선생은 물론 옆집 사람에게 미안한 감을 덜어주기 위해 임시 방편으로 꾸며낸 말이었다. 선생은 그런 농담을 하는 바람에 옆집 사람은 크게 웃으며 선생의 대쪽같은 성품에 다시 한번 머리를 수그리게 되었다고 한다.

 

12

퇴계와 기생과 매화

퇴계 선생이 단양군수로 계실 때다.
인물 좋고 마음씨 너그럽고 글 잘하시는 퇴계 선생에게 은근히 마음을 두고 온 기생이 한 사람 있었다. 선생을 사모하는 기생의 마음은 드디어 짝사랑으로 변해 선생에게 환심과 주의를 끌려고 선생님 앞에서 온갖 교태를 다 부려 보아도 선생은 태산반석과 같이 조금도 마음의 동요가 없었다.

기생은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한 나머지,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서 올린다, 옷을 지어 바친다, 기타 다른 진귀한 물품을 마련해서 선생에게 바친다, 온갖 것을 선생에게 바치며 정을 전하려 했다.
그러나 청렴한 선생은 민폐가 된다고 그러한 어떤 것도 받지 않으셨다. 그러자 사모하는 마음 간절한 기생은 마음 전할 길이 없어 기생은 짝사랑의 깊은 상처를 입어 시름에 빠져들었다.

어느날 선생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이방에게 선생은 무엇을 좋아하시는가 하고 물으니, 선생님은 梅花(매화)를 좋아하신다고 알려 주었다.
그러자 기생은 당장 끼고 있던 옥반지를 빼서 종에게 주며 세상 끝까지라도 찾아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매화나무를 구해오라고 했다.
종은 여러 곳을 다니며 매화를 구하다가 옥 보다 더 희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매화 한 그루를 구해서 기생에게 가져갔다. 기생은 그 매화를 들고 퇴계 선생 앞에 나가 매화를 바쳤다.
기생의 마음을 안 선생은
[땅에 심는 나무야 못 받을 것 없지]하시며 그 매화나무를 단양 군청 뜰에 심어서 감상하시다가 퇴임 후 도산으로 오실 때 그 싹 하나를 띠어서 서당 앞에 심고, 계속 그 매화를 번식시켜 지금의 이르렀다고 한다.

퇴계가 단양군수를 마치고 떠날 때는 조랑말 한 마리에 실린 두 궤짝의 책과 水石(수석) 몇 점과 입던 옷가지뿐 이였다. 이별이 아쉬워 관원들이 삼(麻) 다발을 선사하자 한사코 사양하니 관원들이 모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한다.

풍기군수를 사직하고 떠날 때도 책 두 궤짝 만 이였으니 오늘에 우리들이 모두 흠모하는 청렴결백한 공무원상을 450년 전에 이미 몸소 보이신 위대한 선생의 정신은 길이 빛을 남길 것이다.

 

13

퇴계선생 주계(酒誡)

아! 술이 사람을 심하게 해침이여
내장을 상하게 하여 질병이 생기게 하고
성품을 미혹되게 하여 덕(德)을 잃게 하도다.
개인적으로는 몸을 해치고
국가적으로는 나라를 넘어지게 하도다.
내가 그 해독(害毒)을 경험했거늘
그대는 그 구덩이에 떨어졌구나.
그것을 막고자 주계(酒誡)를 지으니
어찌 함께 힘쓰지 아니하리요
힘써 제지하면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는 길이니라.

 

14

퇴계선생의 자명(自銘)

퇴계선생은 자기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다음과 같은 자명을 지어 늘 자신을 경계하였다고 한다.

나면서 어리석고, 자라서는 병도 많네.
중년엔 어찌하다 학문을 즐겼으며, 만년엔 어이하여 벼슬을 받았던고?
학문은 구할수록 멀기만 하고, 벼슬을 사양해도 더 내리시네.
나아가면 쓰러지고, 물러나서는 곧게 감추니
나라 은혜 망극하고, 성현 말씀 두렵도다.
높고 높은 산이 있고, 끊임없이 흐르는 물이 있네
관복을 벗어버리니, 온갖 비방 다 벗었네
내 생각 막혔으니, 누가 내 뜻 알아주랴
옛 사람 생각하니, 내 마음 쏠리도다.
뒷날에 오늘 일을, 어찌 몰라주랴.
근심 속에 낙이 있고, 낙 가운데 근심 있네!
자연으로 돌아가니, 또 바랄 것이 무엇이랴?


生而大癡 壯而多疾
中何嗜學 晩何切爵
學求猶邈 爵辭愈孀
進行之겁 退藏之貞
深慙國恩 亶畏聖恩
有山巍巍 有求源源
婆娑初服 說略衆산
我懷伊阻 我佩誰玩
我思故人 實獲我心
寧知來世 不獲今兮
憂中有樂 樂中有憂
乘化歸盡 復何求兮

 


15

바위의 글을 써서 지도

義城(의성) 비안면에서 남쪽으로 약 3km 정도 가면 烏南洞(오남동) 드무뜰 마을에 이르는데 이 마을 앞에 검바위 란 골이 있다.

이 절벽에 이르면 앞에는 푸른 강물이 흐르고 위로는 층암절벽이 억겁의 위엄을 자랑하고 있다.
朝鮮朝(조선조) 12대 仁宗(인종) 때 이곳 比安縣(비안현)의 주민들이 살림이 넉넉하고 해마다 풍년이 들자 그만 나태와 사치와 낭비에 흐르고 알뜰한 마음을 사라지고 정신상태가 해이해지기 시작했다.
이를 본 퇴계선생인 이래서는 아니되겠다고 이를 경계하고자 현밀들이 자주 다니는 이곳 고갯마루 큰 바위에 退溪(퇴계) 선생이 직접 바위에다 [모든 사람들은 다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라는 뜻으로  儉(검)자를 쓰고, 그것을 당시 石工(석공)을 시켜 크게 새겨서 모든 사람이 잘 보고 지키도록 하였다고 전하여 오고 있다.

 

 

 

李堣(이우)의 묘갈명

 

李堣(이우) 睿宗 1年 己丑(1469)~ 中宗 12丁丑(1517) 49

字 明仲. 號 松齋. 官 戶曹參判 眞誠人

 

공의 묘소는 온혜동 뒷산 수곡 동록에 있다. 묘 앞에 조카 퇴계 撰碑(찬비)가 서 있는데 이씨 부인 묘 앞에는 1564년애 舊碑(구비)가 그대로 서 있다. 貞夫人 月城李氏之墓(정부인 월성이씨지묘)陰記(음기) 중에 皇命四十三年 甲子 五月慶州中移于抱川之雙谷 曾祖大護軍 蔓實 祖諱繩直 司憲府大司憲 考諱時敏成均生員 娶安東權氏 橫城縣監啓經女 生成化己丑 正德丁丑公卒 葬于 禮安溫溪里之樹谷 後二十年夫人沒 附葬于墓後 察訪旣竪碣兩墓 未及刻文又沒 後于十六年而憑等 乃姑追刻文字....

황명 43년 갑자 5경주에서 포천의 쌍곡으로 옮겼다. 증조부는 대호군 蔓實(만실), 조부는 휘 繩直(승직)인데 사헌부대사헌, 부친의 휘는 時敏(시민)인데 성균 생원으로 안동 권씨에게 장가들었고, 횡성현감 啓經(계경)의 딸이 성화 기축년에 공을 낳았다. 정덕 정축년에 공은 졸 하여 예안 온계리 수곡에 장사지냈다. 그 뒤 20년에 부인이 죽고, 공의 묘 뒤에 부장하였다. 察訪(찰방)은 이미 두 묘에 竪碣(수갈)하였으나 돌에 문자를 각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 뒤 죽었는지 16년 뒤에 ()이 이에 추가로 문자로 각한다.....를 판독 할 수 있었다.

곧 공의 사망 후 20년에 부인 이씨가 죽으니 공이 묘 뒤에 부장하고 아들 황산도 찰방 壽苓(수령)이 비석을 갖추어 각문하려 하였으나 또 죽으니, 손자 禮賓寺(예빈시) 僉正(첨정) ()16년 뒤에야 비석을 수립 하였다 한다. 곧 명종 19년 감자(가정 43, 1564)에 양위분의 비석이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이로 밀어 보면 공의 墓前碑(묘전비)도 부인 묘비와 동일형식이였으리 생각된다.

叔父戶曹參判府君墓碣識

叔父參判府君姓李氏其先自眞寶避倭寇移居于安東高祖諱子脩當麗季以討紅賊功封松安君官至判典議寺事曾祖諱云侯軍器寺副正贈司僕寺正祖諱禎嘗爲寧邊判官從征毛憐衛有功仕終善山府使贈兵曹參議考諱繼陽成均進士贈嘉善兵曹參判參判娶英陽金氏副司直有庸之女又移于禮安縣之溫溪里府君生於成化己丑四月日少好讀書善屬文與吾先君金昆玉友壎唱篪和聲名俱盛嶺南秀士咸推先焉壬子中生員弘治戊午登第選入承文院權知副正字己未移藝文館檢閱歷待敎奉敎辛酉秋例陞成均館典籍八月拜司諫院正言拜吏曹佐郞甲子春陞爲司諫院獻納俄遷兵曹正郞知製敎乙丑進拜司憲府掌令七月兼春秋館記注官尋遷奉常寺僉正九月拜司諫院司諫餘如故正德丙寅夏遷軍器寺副正七月陞通政大夫承政院同副承旨知製敎兼春秋館修撰官九月中廟卽位錄功爲奮義靖國功臣封靑海君秩嘉善大夫承政院右副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朝議謂政院三品官也而今承旨階皆嘉善非事之宜府君亦遞封君以親老乞外除晉州牧使斯時也民新出於水火之中望治如飢渴府君爲政淸簡務在與民休息獄市不擾撫摩而振德之恩信孚洽百姓愛之如父母上特賜表裏嘉奬焉己巳入爲同知中樞府事未幾拜戶曹參判兼都摠府副摠管庚午夏轉刑曹參判出爲江原道觀察使辛未期滿封君壬申以親老辭職還鄕仍身病杜門不出除寧海金海兩府使皆不赴甲戌春論者以爲靖國之日承旨等無功而有過請追勳資從之蓋是夜聞有變入直承旨當出偵變僚員以出外爲憚而推之府君府君不得已而出旣出內外隔絶無緣復入而大議已定大臣以稟命慈殿不可以無承旨遂與之俱詣東朝克成捧日之擧時人不辨其由而捃摭爲辭府君固常以貪天之功爲恥至是心始幸而安焉顧於黮闇之言不容默默乃上疏自明上賜手敎慰答焉越明年乙亥拜安東府使丙子又以政最加奬諭復授嘉善丁丑十一月初八日病卒于官享年四十九歸葬于里之樹谷先塋之東府君神骨淸秀韻致高遠溫良愷悌篤於孝義事大夫人承順怡愉極其懽豫撫敎諸孤姪猶己之子接物以和雖遇倉卒未嘗見其有疾言遽色平居左右圖史嗜之如芻豢雖疾病支離手不釋卷爲文章淸贍典雅尤長於詩其與一時名勝相遇必命酒哦詩暢適忘形雖敲金擊石之樂無以過也府君材蘊足以揚明廷文學足以賁鴻猷風範足以鎭浮俗不幸而遭世罔極莫由展抱迨夫聖上龍飛則又以親老身病乞養投閒前後相踵無復有邇淸光之日而誣言指目又從而橫被焉謂之何哉府君忠孝一念跬步不忘而後來聖君方垂意慈親尙無恙年未耆艾而奄忽喪逝終不免抱遺恨於冥冥福善之理乖舛如此可勝痛哉府君配曰月城李氏生員諱時敏女大司憲諱繩直之孫封貞夫人夫人貞靜端一溫恭慈惠養親侍疾躬調膳餌冬月手爲之龜閨庭雍穆若無人聲而婢僕盡心內外衆務無不整辦夫人生一男曰壽苓黃山察訪二女咸安郡守曺孝淵全義縣監吳彥毅察訪三男曰憑二女李令承蔡雲慶外孫四人曺允愼允懼吳守貞守盈允懼守盈進士溫溪之上有先人手植松林府君就其旁築室居之以寓桑梓之感因自號爲松齋所著詩文多散逸有關東錄歸田錄今合爲松齋集一卷又有東國史略二卷夫人後於府君二十年而歿葬之同原才免喪而察訪又歿以故墓道久未有刻文今憑等圖議謹識世系志行之梗槩刻之碣陰至如銘文之作則滉所不敢以竢夫後來之君子云年月日姪滉泣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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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부 호조참판부군 묘갈식

숙부 참판부군의 성은 李氏(이씨)이고 그 선계는 眞寶(진보)에서 비롯되었는데 倭寇(왜구)를 피하여 安東(안동)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고조의 휘는 子脩(자수)인데, 고려 말기 홍건적을 토벌한 공으로 松安君(송안군)에 봉해졌으며 관직은 判典議寺事(판전의사사)에 이르렀다.

증조부의 휘는 云侯(운후)인데 軍器寺副正(군기사부정)을 지냈으며 司僕寺正(사복사정)에 증직되었다. 조부의 휘는 ()인데 寧邊判官(영변판관)을 지내다가 毛憐衛(모련위)에 종군하여 공을 세워 나중에 善山府使(선산부사)가 되었으며 兵曹參議(병조참의)로 중직 되었다.

아버지의 휘는 繼陽(계양)인데 성균진사로서 嘉善兵曹參判(가선병조참판)에 증직되었다.

參判(참판)은 영양 금씨 副司直(부사직) 有庸(유용)의 딸을 얻어 다시 禮安縣(예안현) 溫溪里(온계리)로 이사를 하였다.

부군은 성화 기축 4월에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하고, 글 모으기를 좋아 하였으며, 나의 先君(선군)과 함께, 金昆玉友(금곤옥우) 하늘이 그 마음을 열어 명성이 함께 성하여 영남서 빼어났으며 함께 앞서나갔다.

임자 연간에 생원, 홍치 무오년에 등과해서 承文院權知副正字(승문원권지부정자)로 서발 되고, 기미년에 藝文館檢閱(예문관검열)로 옮겨가서 待敎(대교)奉敎(봉교)를 역임하였다.

신유년 가을 성균관전적으로 승진하고, 8월에사간원정언을 배수하고 겨울에 吏曹佐郞(이조좌랑)에 배수 되었다. 갑자년 봄에 사간원헌납으로 승진되고 다시 兵曹正郞(병조정랑)으로 전직되고 知製敎(지제교)가 되었다. 을축년에 사헌부장령을 배수하고, 7월에 춘추관기주관 겸 봉상사첨정에 올랐다.

9월에 사간원사간을 배수되었으며 이같이 하여, 正德(정덕) 병인년 여름 군기사부정으로 옮겼다. 7월에 통정대부승정원동부승지지제교겸춘추관수찬관으로 승진했고, 9월에 奮義靖國功臣(분의정국공신)이 되어 靑海君(청해군)으로 봉해졌고. 다음에 가선대부 승정원우부승지겸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이 되되게 조정에서 의논하여 정원의 3품관으로 하니, 지금 모두 명을 받들어 좋다고 하는지만 마땅한 일이 아니라고 부군은 또한 봉군을 받아들이지 아니했다.

겨울, 부모가 나이 많아 외직을 청하니, 진주목사를 그만 때가 이때 이였다. 백성들을 수화 속에서 새로 나온 듯 기갈이 든 것같이 다스려 주기를 바랐다. 부군은 정치를 맑고 깨끗하게 하고 힘써 백성과 함께 하였으며, 옥사를 어지러이 하지 않았고, 덕으로서 무마하니, 은혜와 믿음이 흡족하고 백성들을 부모같이 사랑하며, 위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언행과 속으로 가지는 생각을 특히 잘 하니 아름답고 권장 할 만하였다.

기사년 동지중추부사로 들어가 얼마 되지 않아 호조참판겸도총부부총관에 임명되었다.

경오년 여름, 형조참판으로 전직하고, 겨울에 강원도관찰사로 나갔다. 신미년 封君(봉군)期滿(기만)되었다. 임신년 부모가 연로하여 사퇴하고 고향에 돌아와 이에 신병으로 두문불출 아였다. 寧海(영해)金海 두 붓를 사직하고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갑술년 봄 어지럽던 나라를 태평하게 하던 날, 승지 등은 공훈이 없으면서 과오가 있는 자를 추가로 공로를 청하려 하는 밤에, 변고가 있는 것을 알았다.

입직승지가 나가서 변고를 정탐하고, 동료들이 나아가 규탄을 하며 부군도 함께 가자하니, 부군은 부득이 나갔다. 이미 나가니 내외가 격리 되어 다시 들어 갈 수가 없었고, 그때 大議(대의)는 이미 정해지니 대신이 慈殿(자전)의 명을 받들어, 따르지 아니할 수 없게 되었다.

드디어 모두 東朝(동조)에 가서 그날의 거사를 이루니, 그때 사람들은 그 이유를 말하지 못하고 하소연만 하였다.

부군은 항상 남의 공을 탐내어 자기(自己) 힘으로 이룬 체는 것을 수치로 여겼는데 이렇게 되니 마음이 편안해 졌다. 돌이켜 감추고 숨어 있는 말을 묵묵히 받아들일 수가 없어 이에 자명하게 상소하였다.

상감은 손수 위로하는 담장을 하였다.

다음 해인 을해년, 안동부사에 임명되고, 병자년에 또 가장 잘 정사를 잘 해서 또 嘉善(가선)이 되었다. 정축 118일 병으로 관직을 사퇴하고 졸하니 향년 49세였다. 장지는 수곡 마을 선영 묘의 동쪽이다.

부군은 神骨(신골)이 밝고 깨끗하며. 고상하고 우아하며, 높고 먼 꿈이 있으며, 온순하고도 겸허해서 효와 의에 독실하였다. 부인을 잘 도우며 기쁘게 받들고, 많은 어린 조카들을 사랑으로 어루만지며 교육하였다.

오직 자기 자식에게는 사물을 접함에 서로 화합하고 갑작스러운 경우를 당해도 그 아픈 대를 들어내기 말라 하였다.

평상시 좌우에 문서를 비끼며 마치 진수성찬을 맛보듯 하였으며 비록 질병에도 버리지 아니하고 손에서 책을 내 버리지 아니하였다.

문장은 맑고 여유로우며 법도에 맞고 단아하며, 더욱 ()에 능해서 한 때 명승지를 갔을 때는 반드시 술을 드시며 시를 지었으나 자신을 잊었고 비록 풍류의 즐거움을 즐겨도 도에 넘치지는 아니하였다.

부군은 조정을 밝게 할 충분한 재능을 쌓았고, 문학은 족히 크고 깊으며, 풍채는 족히 속됨을 뛰어 넘었으나 불행이도 망극한 세상을 만나 포부를 펴보지 못하고 聖上(성상)을 더욱 성스럽게 하지 못하였다.

또한 부모가 늙고 병든 몸이라, 봉양을 하기에 전후 잇따라 하니 맑은 날을 다시 만나지 못하였다. 무고하게 참소하는 자에게 지목 되고, 또 뜻하지 않는 가로놓인 화난이 따르니 어찌해야 하나.

부군은 충효 일념으로 나아가는 것을 잊지 아니하고, 후배에게 성군이 내리는 뜻을 부모 말처럼 근심 없게 받들라 하였다. 연말에 나이가 많아 문득 명이 끝나니, 품었던 유한은 아득하여 끝남이 없었다. 福善(복선)의 이치는 이같이 어그러지니 가히 아프고 슬프도다.

부군의 배위는 月城(월성) 李氏(이씨) 생원 時敏(시민)의 딸이며, 대사헌 繩直(승직)의 손녀이다. 그리고 부인은 貞夫人(정부인)으로 봉해졌다. 부인은 정숙하고 단아하며 온순 경건하고 인자하며, 부모의 병 수발을 함에 몸소 반찬을 만들어 올리고, 겨울에 손발이 트도록 힘겨워도 규방은 온화하여, 마치 사람이 없는 듯 조용하니 노비들은 진심으로 안팎에 많은 일을 잘하여 더 말을 하지 않아도 잘 되어 갔다.

부인은 아들을 한명 낳았는데 壽苓(수령)이라하고 黃山察訪(황산찰방)이 되었다. 두 딸은 咸安郡守 曺孝淵(조효연), 전의현감 吳彥毅(오언의)에게 각각 갔다.

察訪(찰방)의 삼남은 (), ()()이고 이녀는 李令承(이령승)蔡雲慶(채운경)에게 갔다. 외손이 4명인데 曺允愼(조윤신)允懼(윤구)吳守貞(오수정)守盈(수영)允懼(윤구)守盈(수영)이다.

溫溪(온계) 위에 先人(선인)의 손으로 심은 송림이 있는데, 부군은 그 옆에 거실을 지어 桑梓(상재)의 감으로 지냈으며, 그래서 호를 스스로 松齋(송재)라 하여 저술하는 시문에 많이 썼다.

關東錄(관동록)에 있는 歸田錄(귀전록)은 지금 松齋集(송재집) 1권에 합쳐져 있고, 東國史略(동국사략) 2권에도 있다.

부인은 부군이 죽은 지 20년뒤에 죽었는데 부군과 같은 둔덕에 장사지냈다. 상을 탈상하자 察訪(찰방) 또한 죽었으므로 墓道(묘도)刻文(각문)을 못하였는데 지금에 와서 世系(세계)志行(지행)을 음기에 기록하려 하여 이렇게 銘文(명문)을 작성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은 감히 다음 사람들에게 전해서 말하려 하는 바이다.

年月日(년월일) () 울면서 쓰다.

 

 

 

 

李滉(이황) 선생의 일화.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다.

1501(연산군7)에 진사 이식의 8남매 중 막내아들로 경상도 예안 (지금의 안동시)에서 태어난 李滉(이황) 자는 경호, 계호이고 호는 退溪(퇴계) 이다.

그는 태어난 지 불과 7개월 만에 당시 40세의 장년이던 아벼지를 여의었다. 그로 말미암아 그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지 못하고 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라야만 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과부의 자식은 배운 것이 없다고 비웃으니, 희들은 다른 사람보다 힘쓰지 않으면 어떻게 이런 비웃음거리를 면할 수 있겠느냐?”

이황의 어머니가 말했다.

. 가슴깊이 명심하겠습니다.” 李滉(이황)이 대답했다.

침식을 거의 잊고 독서를 하였다.

<출전: 인물 왕조실록 >

 

 

 

李滉(이황) 선생의 일화.

 

이황은 6이웃 노인에게 천자문을 배우는 것을 시작으로 문의 길에 들어갔다. 12세부터 숙부인 이우에게 論語(논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우는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와 병조참판을 거쳐 경상도와 강원도 관찰사를 지내다가 고향인 토계동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미 통감끝낸 이황은 이우로부터 논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하랴.

벗이 있어 먼 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하랴.

 

이황은 논어의 이 같은 구절을 읽으면서 성현의 가르침을 깨쳐 나갔다.

14세에 이르자 이황은 비록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일지라도 반드시 벽을 향하여 조용히 생각하고 있을 정도로 학구열이 높아갔다.

20세 무렵에는 거의 잠자고 식사하는 것도 잊고 주역공부에 열중했다.

周易(주역)은 동양철학의 가장 심오한 이치가 담겨 있는 책이었다. 그 어느 책보다도 이해하기 힘든 책이었다. 이황은 밤낮 주역을 공부하느건강이 눈에 띄게 나빠졌다.

21때 허씨 부인과 결혼한 이황은 27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어머니의 소원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기 위하여 태학 , 成均館(성균관)에 들어가 그 이듬해 사마시에 합격했다. 33세에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金麟(김인후)교제하면서 심경부주에 크게 심취했다. 심경부주는 마음의 수양을 위하여 성현들의 심오하고 치밀한 생각을 기록한 책이었다. 그 런데 이 책에 달린 ()가 모두 程子(정자) 朱子(주자) 같은 송나라 학지들의 어록과 같은 것이어서 더욱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황은 다른 책을 참고하고, 미루어 생각하고 사색을 거둡하여 하나하나 깨우쳐 나갔다.

<출전: 인물 왕조실록 >

 

 

 

李滉(이황) 선생의 일화.

 

주자서절요를 펴내다.

마침내 이황은 1534(중종 29) 34세에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른다. 여러 가지 벼슬을 거쳐 공조판서 · 예조판서 · 양관대제 학을 역임했다.

그러나 그가 일생을 통하여 힘을 쏟은 것은 학문이었다.

이러한 그의 학자적 자세는 후세의 사림에게 커다란 영향끼쳤. 그는 고려말기에 수입된 程朱(정주)의 성리학 체계를 계승 집대성하여 조선의 성리학체계를 정립하는데 지대한 공을 세운 것이다.

49세가 되던 해 가을 이황은 병을 얻어 풍기군수를 그만두고 고향 계로 돌아와 한서암이란 집을 짓고 주자전서연구에 몰두한다.

그는 무더운 여름철에도 문을 닫아걸고 주자전서연구에 열중했다.

무더위 때문에 건강을 해칠까봐 두렵습니다.” 주위 사람이 걱정을 했다.

책을 연구하고 있노라면 마음부터 시원해지는데 더위 같은 것이 무슨 걱정이 것이냐. ”

주자전서는 주자가 여러 문인들의 자질과 결함이 각기 다르다는 것을 여러 가지 문답을 통해 깨우쳐 주려고 한 것이 나타나 있다. 찬찬히 생각하면서 읽으면 마치 얼굴을 대하여 가르침을 받는 것 같아 스스로 감격하고 분발하여 크게 깨닫게 된다.”

이황이 주자전서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 이후 이황의 학문 연구 는 주자전서의 연구를 바탕으로 더욱 갚게 전개되었다. 그리고 그는 주자전서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긴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뽑아 주자서절요라는 책을 편찬했다.

 

그 이듬해 그는 주자가 지은 역학계몽을 연구한 책인 계몽전의를 펴냈다.

그 후 이황은 주자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여 59송계원명이학통록이라는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출전: 인물 왕조실록 >

 

 

 

李滉(이황) 선생의 일화.

 

도산서당

이황은 60인동 도산 남쪽에 경치 좋은 곳을 택해 서당을 지었다. 건축을 시작한지 5년만의 일이었다. 이 서당은 堂舍(당사) 두채로 이루어졌다.

당사는 세 칸인데 제자들을 가르치는 마루방은 주돈 이의 雲谷(운곡) 시에 학문에 대한 자신을 오래도록 가지지 못했더니 바위에 깃들려 조그만 효험이라도 바란다.”라는 말에서 따와 巖棲軒(암서헌)이라 이름 붙이고 자신이 거처하는 방은 주돈이의 명당실기완상하여 즐기니 족히 여기서 평생토록 지내도 싫지 않겠다.”는 말에서 따와 玩樂齋(완락재)’라고 이름 붙였다. 합해서 陶山書堂(도산서당)이라고 현판을 달았다.

서당 동쪽 구석에 조그마한 연못을 파고 거기에 ()을 심어 정우 당이라 이름 붙이고, 그 동쪽에 봉천이란 샘을 만들고, 샘 위의 산 기슭을 파서 추녀와 맞대고 평평히하게 단을 만들었다.

그 위에 매화 대나무 소나무 국화를 심어 절우사라 불렀다. 서당 앞에 출입하는 곳을 막아서 사립문을 만들었다. 이름을 유정문이라 했다.

 

문 밖의 오솔길은 시내를 따라 내려가 마을 어귀에 이르면, 양쪽 산기슭이 마주 대하여 있다.

그 동쪽 기슭 옆에 바위를 부수고 터를 쌓으면 조그마한 정지를 지을 만 했다. 그러나 이황은 힘이 모자라서 만들지 못하고 그 자리만 남겨두었다. 마치 山門(산문)과 같아, 이황은 이름을 곡구암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동쪽으로 걸음 나가면 산기슭이 끊어지고 탁영담에 이른다.

그 위에는 큰 돌이 마치 깎아 세운 듯이 서서 여러 층으로 포개 져 있었다. 그 위를 쌓아 ()를 만들었다.

우거진 소나무는 해를 가리고 위로 하늘과 밑으로는 새와 고기가 날고 띈다. 왼쪽과 오른쪽 취병 산의 그림자가 물결 위에 흔들린다.

강산의 훌륭한 경치를 한눈에 다 볼 수 있다.

이황은 천연대라 이름지었다.

이황은 그 서쪽 기슭에 천년대를 본떠서 ()를 쌓았다. 그리고 주자의 시 반 이랑 네모난 연못이 한 거울을 이루었으나, 하늘 구름 그림자가 함께 돌고 돈다의 구절을 빌려 天光雲影(천광운영)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 훌륭한 경치가 천연대에 못지 않았다. 반타석은 탁영담 가운데 있다. 그 모양이 편편하여 배를 매 두고 술잔을 서로 주거니 거니 만하다. 큰 홍수를 만날 때면 물속에 잠겼다가 물이 빠지고 물결이 맑은 뒤에야 비로소 드러난다.

 

그리고 서당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은 제자들이 거처하는 여 방에는 시습재 · 지숙료 · 관란헌이라 이름 붙이고,

이것을 모두 협해서 농운정사라고 현판을 달았다. 이황은 이로부터 7년 동안 서당에 기거하면서 독서 · 수양 · 저술에 전념히는 한편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이 무렵 이황에게는 유명한 제지들이 모여들었다. 金誠一(김성일) 제와 柳成龍(유성룡) 등이 바로 그들이었다. 金誠一(김성일)은 뒷날 홍문관 부제학과 경상감시를 지냈고, 임진왜란 때에는 초유사가 되어 경상도 진주에서 싸우다 죽었다. 柳成龍(유성룡)뒷날 영의정 벼슬까지 한 유명한 정치가가 되었다

<출전: 인물 왕조실록 >

 

 

 

李滉(이황) 선생의 일화.

 

도산잡영

이황의 도산잡영이 이루어진 내력은 도산잡영병기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도신잡영독립된 작품으로 수 있을 정도로 완결된 작품이다.

이황 산문문학의 정수라고 수 있다. 도산잡영병기는 도산에 서의 이황의 내적 · 외적 생활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직품이다.

나는 항상 오랜 병의 시달림에 괴로워하기 때문에, 비록 산에 살더라도 마음을 다해 책을 읽지 못한다. 깊은 시름에 잠겼다가 조식(調息 호흡법)때로는 몸이 가뿐하고 마음이 상쾌하여 우주를 굽어보고 우러러보아 감개가 생기면 책을 덮고 지팡이를 가지고 , 미루에 나가 연못을 구경하기도 하고 단에 올라 사(. 절우시)를 찾기도 하며, 을 돌면서 약초를 심기도 하고 숲을 헤쳐 꽃을 따기도 한다. 혹은 돌에 앉아 샘물을 구경하기도 하고 대에 올라 구름을 바라보며, 여울에서 고기를 구경하고 배에서 갈매기와 친하면서 마음대로 시름없이 노닐다가, 좋은 경치 만나면 흥취가 절로 일어 한껏 즐기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고요한 방안에 쌓인 책이 가득하다.

 

淨友堂(정우당)

사물마다 모두 오묘한 한 하늘을 머금고 있거늘

염계어찌하여 그대만은 어여뻐 여겼느냐

향기로운 그덕을 가만히 생각하면 참으로 벗하기 어렵구나

한 가깨끗한 벗이라고 일컫는 것 또한 치우쳤을까 두렵구나.

정우당은 도산서당 앞의 못이다.

淨友(정우)는 연꽃을 말한다. 성리학을 연구하는 사대부들이 연꽃을 좋아하고 숭상했다. 연꽃은 군자를 상징한다.

송나라의 주돈이가 연꽃의 특징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애련설을 것은 알려져 있다. ‘사물마다 모두 오묘한 한 하늘을 머금고 있거늘에서 오묘한 한 하늘(妙一天ψ)은 태극을 이야기한다. 태극이란 유교의 본체로서 핵심이다. 모든 사물을 태극을 지니고 있다.

본체로서의 태극과 개체로서의 태극이 바로 그것이다.

둘이면서 하나요, 하나이면서 둘이다.

 

盤陀石(반타석)

누렇고 탁한 물이 도도할 적엔 문얼굴을 숨겼다가

물이 빠져 고요히 흐를 때비로소 나타나네.

어여쁘다 내달으고 들이받는 물결 속에서도

천고의 반타석은 구르거나 기울지도 않는구나.

탁영담 안의 반타석을 읊은 이 시는 이황 자신의 외적 처지로 있다. 이황이 그 당시 거듭 도산에 물러 나와 있을 그의 현실 인식은 누렇고 탁한 물이 도도할 적과 같은 것이었다.

사림정치가 훈구 세력을 극복하고 얼마 안 되어서 사림이 동서로 분열되었다. 이황은 유교적 이상을 도산에서 후진을 양성하면서 국가와 사회를 밝혀 보겠다는 원대한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 반타석은 이황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다. 휩쓸려 쓰러지지 않겠다는 이황의 의지가 표방되어 있다.

                           <출전: 인물 왕조실록 >

 

 

 

 

李滉(이황) 선생의 일화.

 

奇大升(기대승)과의 논쟁

이황이 한성에 살던 53세 무렵 옆집에 추만 정지운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정지운은 하늘과 인간이 도덕적으로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그림으로 그린 天命圖(천명도)를 가지고 이황을 찾아왔다.

동생을 가르치기 위해 천명도 그려봤는데 틀린 데가 없는지 봐주십시오.”

정지운이 말했다. 이황이 정지운이 건네준 천명도를 들여다보았다.

4단은 ()에서 생겨나고 7정은 ()에서 생겨난다는 부분을 4단은 ()가 드러난 것이고 7정은 ()가 드러난 것이라고 고쳤네. ”

이황이 천명도를 정지운 앞으로 내밀었다. 李滉(이황)은 정지운의 천명도를 고쳐준 얼마 안 가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 그림은 은 학자들 사이에 논란을 불러 일으켯다. 급기야 6년이 지난 , 奇大升(기대승)李滉(이황)에게 편지를 보내오면서 논쟁이 시작되었다.

 

奇大升(기대승)1527(중종 22)에 태어나서 1572(선조 5)에 죽은 성리학자 였다. 이황보다 훨씬 나이가 어렸지만, 이황과 8년동안 편지로 성리학 이론에 대한 토론을 했다. 이황은 천지만물과 인간의 근본을 이루는 것으로 ()()가 있다고 보았다. ()()가 서로 조화를 이루어 만물이 생겨나지만 궁극에 가서는 ()()를 다스려 나간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는 만물의 근원이 되는 본바탕이고 ()우주 만물의 물질적인 힘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대승은 ()()는 관념적으로 구분할 수 있으나 마음의 작용에서는 결코 분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황과 다른 내용의 사단칠정론을 들고 나왔다. 四端(사단)이란 사람의 본성에서 우러러 나오는 () · () · () · ()가지 마음씨를 뜻한다. 그리고 (칠정)은 기쁨 노여움 · 슬픔 · 즐거움 · 사랑 · 미움 · 욕심이라는 일가지 마음의 움직임을 말한다.

이황은 이와 같은 원리에 대해 기대승과 토론을 벌였다.

 

이황의 장은 4단은 언제나 그 결과가 좋은 것이기 때문에 ()에서 나오고 7() 은 결과가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기 때문에 기에서 나온다는 것 이었다. 그러나 기대승은 크게 가지 입장에서 이황의 이론을 반대 한다.

첫째, 세상 모든 것속에는 언제나 기리가 함께 들어 있다. 따라서 마음의 움직임인 4당과 7정도 하나는 리에서 나오고, 하나는 기에서 나온다는 식으로 나눌 수 없다.

둘째, 4도 감정이고 7도 강정이기 때문에 7 가운데 선한 부분 뽑으면 4단이 된다. 그러므로 4단을 7정 가운데 포함시켜야 한다.

셋째, 기는 현모든 변화의 근거이기 때문에 감정의 움직임이 기의 움직임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지만, 리는 언제나 변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움직일 수 없는 리가 드러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기대승의 반론에 따라 이황은 한 물러서서 4단은 리가 먼저 움직이면 기가 따르는 것이고, 7정은 기가 움직이면 그 위에 리가 함께 타서 드러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황은 4단이나 7정이 모두 ()이 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 결과가 4단은 항상 ()으로 귀결되고 7 정은 선일 수도 있고 ()일 수도 있기 때문에 그 두 가지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인지를 살펴 본다면 서로 가리키는 바가 다르다고 했다. 이황은 인간의 본성을 그 본래 타고난 순수한 모습과 욕심에 얽매인 모습으로 나눌 수 있듯이 인간의 감정도 4단과 7정으로 나눌 수 있다고 것 이다.

 

이황은 사람이나 지금 사람들이나 그들의 공부가 차이가 나는 까닭은 오직 ()자를 깨달은 정도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출전: 인물 왕조실록 >

 

 

 

 

李滉(이황) 선생의 일화.

 

도산십이곡

명종이 이황을 다시 조정으로 불러 이조판서의 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이황은 병이 무거워 도저히 명종의 명을 받들 수 없었다. 그래서 명종에게 편지를 올렸다. 명종은 다시 이황을 불렀다. 이황은 끝내 사양 하고 가지 않았다.

명종은 신하들에게 어진이를 부르나 오지 않음을 탄식하도다!’라는 제목의 시를 짓도록 했다.

그리고 몰래 畵工(화공)을 도산으로 보내서 그 풍경을 그려 오게 하여 그것에 다 宋寅(송인)으로 하여금 퇴계의 도산기도산잡영을 써넣게 하여 병풍을 만들었다. 명종은 자신이 거처하는 방에 병풍을 두고 그것을 통하여 아침저녁으로 퇴계를 흠모했다.

이 무렵 이황은 도산십이곡을 지었다.

도산십이곡6곡과 6곡 모두 12수로 연시조이다. 모두 4장에 실려 있고, 작품 끝에 詩序(시서)에 해당하는 것이 2장에 실려 있다.

 

작품은 이황이 말한 대로 6곡은 자기의 뜻을 말하는 言志(언지)이며, 6곡은 자기의 학문과 덕을 닦음의 실제를 작품화한 언학이다. 늙음을 잊고, 산과 강사랑함이 지극하여 마치 불치의 깊은 병에 걸린 것 같이 되었음과 학문을 가르침과 사색에 깊이 빠진 생활을 솔직 담백하게 묘사해놓았다.

안개로 집을 삼고 풍월로 벗을 삼아

태평성대에 병으로 늙어가네

이중에 바라는 일은 허물이 없고자.

山水(산수)로 집을 만들고 바람과 달로 벗을 지어 태평한, 거룩한 세상에 병으로 늙어가는 것을 이야기하고 그런 중에 바라는 것은 허물이나 없고자 하는 바노래하고 있다.

 

청산은 어찌 하여 만고에 푸르르며

유수는 어찌하여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고

우리도 그치지 마라 만고상천하리라.

萬古常靑(만고상청)은 영원히 항상 푸른 것을 말한다. 푸른 산은 어찌 하여 영원히 푸른 것이냐. 그리고 흘러가는 강물은 어찌하여 밤낮에 그 치지 아니 하는가 묻고서, 우리도 저 물과 같이 끊게 하지 말고서 그리고 저 산과 같이 영원토록 항상 푸르리라는 것을 노래 하고 있다.

 

난꽃이 골짜기있으니 자연이 좋다 좋구나

구름 산에 있으니 자연이 보기 좋구나.

중에 저 한분의 미인 더욱 잊지 못하겠구나.

난초가 골짜기에 있으니 자연히 냄새를 맡기가 좋고, 구름이 산을 감돌고 있으니 자연히 보기가 좋다고 하고서는 그런 중에라도 오직 우리 임금님만은 더욱 잊지 못하겠다고 노래하고 있다. 새로 왕위에 오른 선조가 이황을 여러번 불렀다.

1567(선조 즉위년), 이황은 세번 사양하다가 이상 거절하지 못 하고 서울로 올라갔다. 그의 나이 77세로 대제학이 되었다.

이황은 선조에게 무진육조소라는 글을 올렸다. 6조소는 어질고 좋은 임금이 되기 위해 몸을 살피고 마음을 닦아 지키고 행하여야 할 일을 여섯 조 목으로 나누어 자세히 적은 글이었다.

 

첫째, 계통을 중하게 여껴 仁孝(인효)를 온전히 할 것입니다.

둘째, 참소하고 이간하는 것을 막아셔 양궁을 친하게 할것입니다.

셋째, 聖學(성학)을을 독실히 하여 정치의 근본을 세울 것입니다.

넷째, 도덕과 학술을 밝혀서 인성을 바르게 할 것입니다.

다섯째, (심복)을 밀어서 耳目(이목)을 통할 것입니다.

여섯째, 성심으로 몸을 닦고 살펴서 하늘의 사랑을 받도록 하시는 것엽니다.

                                               <출전: 인물 왕조실록 >

 

 

 

 

李滉(이황) 선생의 일화.

 

聖學十圖(성학십도)

1567(선조 즉위년) 12월 퇴계는 聖學十圖(성학십도)를 지어 선조에게 바쳤다. 聖學이란 聖王 즉 훌륭한 임금이 되는 길에 대한 가르침을 말한다. 이 책은 10개의 도표와 간단한 해설로 이루어져 있다.

 

1도 태극도 ; 주돈이가 그림을 그리고 그것에 대한 설명을 한 것 이다.

2도 서명도; 서명은 장재의 글이고, 그림은 정임은의 작품이다.

3도 소학도 ; 제사는 주자의 말이고, 그림은 소학의 목록에 의한 이황의 작품이다.

4도 대학도 ; 본문은 주자의 대학경의 일장이고, 그림은 권근의 작품이다.

5도 백록동규도 : 규약은 주자의 글이고 그림은 이황의 작품이다.

6도 심통성정도 : 上圖(상도) 및 도설은 정임은의 저작이고, 그림은 이황의 작품이다.

7도 인설도 : 그림 및 그림에 대한 설명이 모두 주자의 저작이다.

8도 심학도 ; 그림 및 그림에 대한 설명이 모두 정임은의 저작이다.

9도 경재잠도 ; ()은 주자의 말이고 그림은 왕노재의 작품이다.

10도 숙흥야매잠도 ; 잠은 진남당의 말이고, 그림은 이황의 직품 이다.

 

많은 부분이 선현들이 쓰거나 그린 것이지만 이들 유학 사상의 근본 원리와 실천 방법의 집약은 이황에 의해 독창적으로 배치되어 서로 유기적으로 관련됨으로써 생명이 있는 전체적 체계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선조는 이황의 뜻을 갸륵하게 여겨 신하들에게 병풍으로 만들어 올리라고 명했다.

                                                         <출전: 인물 왕조실록 >

 

 

 

 

李滉(이황) 선생의 일화.

 

주자의 직제자

이황의 학문은 철학적인 깊이까지 파고 들어가 하나의 독창적인 학파를 형성했다.

이황의 학문과 사상은 이웃나라인 일본과 중국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한국의 역시를 통하여 영남 지방을 배경으로 한 주리적 퇴계학파를 형성해왔고 일본 유학의 기본학파 구마모도학파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쳐왔다. 기몬학파의 창시자 야마사키는 퇴계를 주자의 직제자와 다름없다.” 하고 조선의 一人(일인)이라고 평가했다.

한편 중국의 량치차오는 퇴계를 聖人(성인)’이라고 호칭했다.

<출전: 인물 왕조실록 >

 

 

 

 

李允貞(이윤정) 선생의 일화

엄동에 열린 효행

 

조선 중종 혜 경상도 풍기군 생현면에 이윤정(李允貞)이란 효자가 살고 있었다.

이 공은 원래 안동 땅에서 태어났으나 어릴 때 부모와 함께 이사와 생고개(生峴)에서 자랐다.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곤궁한 생활로 인해서 고생스러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두 분의 형이 있었으나 콘 형은 예천에 나가 살고 둘째 형은 소년 시절에 죽고 말았다.

 

선비 출신의 부친은 책으로 소일할 뿐 어머님과 공이 모진 일에 시달리며 가세를 꾸려 나가야 했다.

 

그러나, 공은 천성이 순후하고 효성이 지극했으며, 남달리 부지런하여 험준한 소백 산록을 오르내리며 약초를 캐고 새벽 이슬을 밟으며 나무를 해서 장터에 내다 팔기도 하여 지성껏 부모님을 봉양했다.

남달리 생선을 좋아하시는 어버이인지라 장터에서 돌아올 때는 어겁없이 지게목발에 생선이 달리었다.

 

그러던 어느 해 겨울에는 눈이 몹시 왔다. 생고개 언덕 위 공의 접을 거의 덮는 큰 눈이었다. 우람하게 치솟은 소백산도 온통 은탑을 셰워 놓은 듯 했다. 생고개를 드나드는 모든 교통이 끊어지고 말았다.

 

이럴 때에 공교롭게도 공의 부친께서 병석에 눕게 되었다. 평소 약하셨던 분이라 좀처럼 병석을 털고 일어날 줄 몰랐다. 눈은 이틀이 멀다 하고 내려 겨우 변소길 출입밖에 할 수 없게 되었다.

 

녹두를 구하여 죽을 쑤었고, 씨 나락을 찌어 이밥을 지었다. 그러나 공의 부천은 곡기를 끊은 채 싱싱한 생선이 먹고 싶다고 하였다.

 

꽁꽁 얼어붙은 눈 속에서 생선을 구할 수도 없지만 설혹 있다 하여도 이 눈걸을 헤쳐 나칼 수 없었다.

 

그러나, 공은 그대로 앉아 있지만은 않았다. 지난여름 미꾸라지를 잡아 왔던 앞 계울에 가보기로 했다. 한 길이 넘는 눈을 헤쳐 가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개울 가 눈을 치우고 얼음을 깨어 낸 후 나머지 물을 푸기 시작했다. 손발이 얼어서 감각을 잃었으나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허사였다.

공은 그만 눈 위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 때 방금 퍼낸 물이 얼어붙은 개울 바닥에 잉어 한 마리가 퍼득이는 것을 보았다.

 

공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 금빛 찬란한 영어를 잡아 정성껏 고아 부친에게 드렸다.

그러자 부친의 병세도 차츰 차도를 보이기 서작했다. 공은 그렇게 하늘이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 후로 공이 이 개울가를 지날 때면 손을 모으고 하늘에 감사함을 잊지 않았다.

 

공이 장성하여 결혼한 후부더 생활은 조금씩 나아지고 부모님들의 시름도 한숨 돌리게 되었다. 가끔 공은 부친으로부터 종형인 退溪(퇴계) 李滉(이황) 선생의 말씀을 들었다. 그러고 사람은 아무리 궁해도 배워야 한다며 학문을 익히도록 하였다.

 

3종숙 되시는 부친을 찾아온 퇴계 이황 선생의 인품과 학문에 감탄한 공은 그 후로 주경야독으로 학문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그려나 펑온한 나달도 장시 뿐 잔병이라고는 모르시던 모친이 병석에 눕고 말았다. 공은 밤을 세워 간호하고 좋다는 약은 다 구하여 써 보았다. 이와 같은 정성에도 백약이 무효인 체 몸은 점점 쇠약해갔다. 기죽만 남은 손을 잡고 몇 밤을 뜬눈으로 셌는지 모른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깊이 갈수록 병이 더해 가더니 세모가 가까와 오자 겨우 눈꺼풀만 움직일 뿐 산사람 같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복숭아가 먹고 싶다고 했다. 눈 덮인 소백산이 더 높아 보였다. 너무나 막막했다. 공의 머리에 펀득 지난 겨울 소백산 선녀 봉에 복숭아가 탐스럽게 달려 있는 것을 생각해 냈다.

 

벌써 몇 달 전이지만 요행이 몇 개 구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소백산에 올랐다. 눈길에 쓰러지고 딩굴기를 여러번 왼종일 산 속을 뒤졌지만 허사였다.

 

바로 천왕봉에 무릎을 꿇었다. 사경을 헤매는 모친을 구해 달 라고 벌고 또 빌었다.

 

땅거미가 주변에 깔리기 시작할 때에야 얼고 지친 몸으로 산을 내려왔다.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 정성이 부족한 탓이구나. 눈 위를 마구 구르며 흐느껴 울었다. 그 때 꼴짜기 지편 맨등성 위 저펀에 이상 하게도 눈이 덮이지 않은 곳이 있었다.

행여나 하고 그곳에 가본 공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천도 복숭아 한 그루가 서 있는데 복숭아가 곱게 익어 있었다.

공은 하늘에 수 없이 절을 하고 그것을 따서 고이 간직하고 돌아 왔다.

 

공의 효성이 하늘에 닿은 것이 다.

밤이 깊어 집에 돌아 온 공은 자신의 상처는 돌 볼 겨를 없이 어머니 방으로 달려갔다.

신기하게도 그 복숭아를 잠수신 모친의 병은 차도를 보이다가 거짓말같이 병석에서 털고 일이 나셨다.

 

효자 이윤정 공, 그는 생전에 부모를 모시는 정성이 극진하여 하늘도 감복하여 그 효성을 도왔다. 부모님 살아생전은 말할 것도 없고, 세상을 뜨신 후에도 그의 정성은 더 극진했다.

 

세상을 뜨신후에는 묘 옆에 움막을 짓고 侍墓(시묘) 살이를 6 년간 했다.

 

공은 시묘를 하면서 풍우한설(風雨寒雪)에도 한 번도 집에 내려온 전이 없고 가난으로 생전에 못다한 효도를 다 했다. 움막에 거처하며 초근목피로 연명하고 밤낮으로 묘 주위를 돌며 정성을 다하여 산짐승들도 그 효행에 감복하여 야밤에 울기를 삼갔다고 한다.

 

시묘가 끝난 후에도 산소를 찾는 일을 쉬지 않고 평생을 이었으니 원근 마을에 그 덕행이 널리 알려졌다. 아흔 아홉까지 장수를 한 공은 40여 년 간 산소를 오르내린 셈이다.

 

공의 효성이 고을은 물론 조정까지 알려져 1545(명종 원년)에 그 지극 한 효성을 거리가 위하여 생현(생고개) 마을 앞에 旌閭(정려)를 세웠다.

 

참고 문헌 <李允貞事錄(이윤정사록)>

 

 

퇴계(退溪) 선생의 일화.

 

나보다 남을 먼저

 

 

이황(李滉)은 연산군(燕山君) 7(1501), 경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서 이식(李植)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퇴계(退溪)는 그의 호이며 황()은 본명이다.

 

그는 주자학(朱子學)을 중심으로 이기(理氣) 이원론(理元論)을 주창한 대학자이다.

 

이황은 학문을 익히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배운 바를 행동으로 실천한 실천가였다. 이리하여 그의 어진 마음씨에 곁들인 올바른 행동거지(行動擧止)는 뭇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이황이 젊었을 때 과거를 보고자 한양을 향해 떠나게 되었다.

이 때, 그는 하인 한 사람을 데리고 길을 떠났다.

 

서방님, 경치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하인이 죽령(竹領) 고갯길 양쪽에 펼쳐진 짙푸른 숲을 보고 감탄하였다.

그렇구나. 저절로 시가 흘러나올 만한 경치다. 이제 마루턱이구냐.이황은 좌우 풍경을 둘러보며 고개 마루턱을 향해 올라섰다.

 

해는 벌써 서산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잠시 땅을 식힌 이황은 하인을 재촉하여 고갯길을 내려갔다. 두 사람은 고개 밑의 주막에 들러 그 밤을 지냈다.

 

다음 날, 두 사람은 한낮이 거의 다 되어 충청도 땅에 들어섰다.

서방님, 점심 요기를 하고 가야지요? 마을도 멀지만, 아마 점심을 사먹을 만한 주막도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밥을 지어 먹고 가십시다요.

 

하인이 이렇게 말하자, 이황은

그러자꾸나. 밥을 지을 동안 난 저기 가서 좀 쉬었다 오마.하고는 개울가에 우거져 있는 덤불 쪽으로 갔다.

 

하인은 밥을 지으려고 준비를 서둘렀다. 하인은 개울에서 쌀을 씻다가 건너편에 있는 콩밭을 발견하였다.

 

옳지, 저 청대콩을 따다가 넣으면 한결 밥맛이 좋을 거야.

하인은 콩밭으로 들어가 콩을 따다가 넣고 밥을 지었다. 밥이 다 되자 하인은 흐뭇한 마음으로 이황을 불렀다.

 

서방님, 밥이 되었습니다. 어서 오셔서 진지 드십시오.

이황은 하인이 식사 준비를 해 놓은 곳으로 왔다. 그는 밥을 뜨려다가 멈칫하였다.

그리고는 하인을 바라보니, 하인은 영문을 몰라 어쩔 줄 몰라 하며 이황에게 물었다.

서방님, 왜 그러십니까? 밥에 머리카락이라도 들어 있습니까?하인은 이렇게 말하면서, 이황의 밥그릇을 들여다보았다.

 

아무 것도 없잖습니까? 시장하실 텐데 어서 드십시오. 콩이 들어 있어서 맛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이황이 숟가락을 놓으며,

, 이 콩은 어디서 났느냐?하고 물었다.

, 저기 저 밭에서 따왔습니다.

 

하인은 대수롭지 않게 콩밭을 가리키며 대답하였다. 그러자 이황이 정색을 하며 말 하였다.

 

그래서야 되겠느냐? 남의 콩밭의 콩을 주인의 허락도 없이 따다 먹을 수는 없는 거다.

 

하지만 서방님. 한 움큼도 안 되는 콩인걸요.

 

콩 한 알도 남의 것은 남의 것이다. 남의 물건을 허락 없이 갖는 것은 훔친 거나 다름 없다. 어찌 학문을 한다는 사람이 훔친 콩으로 지은 밥을 먹을 수 있겠느냐?

 

이황의 이 말에 하인은 머리를 숙일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였다.

이처럼 이황은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라면 그것이 비록 하찮은 일에 지나지 않더라도 결코 하려 들지 않았다.

 

이황이 한양에서 살 때의 어느 해 가을이었다.

 

이웃 집 밤나무 가지가 울타리를 넘어 이황의 집에까지 뻗어와 있었는데, 하루는 아침 일찍 일어나 뜰을 거닐던 이황이 자기 집 뜰에 떨어진 알밤을 보았다.

 

, 그 밤 크기도 하구나. 녀석들이 일어나면 남의 것인 줄도 모르고 주워 먹겠지.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되겠군.

 

이황은 자기 자식들이 그 밤을 주워 먹을까봐, 떨어진 밤을 주워서 이웃집으로 던졌다. 그 때 하인이 나오다가 보고,

 

나리, 우리 울안에 저절로 떨어진 밤을 왜 그 집으로 넘겨 보내십니까?하고 물었다.

 

그것을 몰라서 묻는 건가? 이 밤이 누구네 것인가?

이황의 이 물음에 하인은,

 

그야, 저 집 것이지요. 하지만, 저 집의 밤나무 가지가 우리 집에까지 뻗었으니, 저절로 떨어진 밤이야 우리 차지가 아니겠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 자네는 그래도 모르는가? 아무리 가지가 우리 집에까지 뻗었더라도 밤나무 임 자는 저 집이니 밤을 주워 돌려보내야 마땅한 법이 아니겠는가. 이런 하찮은 것이라도 중히 여기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서로 믿고 사는 세상이 된다네.

 

이 말에 하인은 아무 말 못 하고 스스로 밤을 주워 울타리 너머로 던졌다.

이처럼 욕심도 없고 남의 물건을 소중히 여기는 이황의 마음 자세는 언제나 한결 같았다.

또한, 남과 나리를 나보다 먼저 생각하고 한 사람의 이익보다 많은 사람의 이익 을 앞세웠다.

 

이황이 늘그막에 고향에 내려와 지낼 때의 어느 날이었다. 이황 대감집 하인이 밭에서 가시나무로 울타리를 치고 있었다. 그때 나들이에서 돌아오던 이황이 그것을 보고 물었다.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게냐?

, 나리. 지금 돌아오십니까? 저 이 길을 막고 길을 저 쪽으로 돌려내려고요.하인이 일손을 멈추고 대답하였다.

 

그래? 뭣 때문에 그러는 게지 ?

, 이 밭 가운데로 통한 길 때문에 밭곡식이 말이 아닙니다. 보세요. 저렇게 짓밟혀 있지 않습니까? 이대로 두었다가는 길 쪽의 곡식은 모두 못 쓰게 될 것입니다.

 

하인은 밭 가운데로 난 길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아닌 게 아니라 하인의 말대로 길 옆의 곡식은 뭇사람들의 발길에 밟혀 짓뭉개져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이 길을 막아 놓으면 마을 사람들이 먼 길을 돌아가야 하지 않느 냐? 어서 터놓아라.

 

하지만 나리 ! 보리 한 알도 아쉬운데 저렇게 많이 짓밟히도록 놓아두면 보리 한 가마는 줄어듭니다. 그러니……」

 

하인이 이렇게 긴 말을 늘어놓자, 이황이 가로 막으며,

 

허허, 웬 말이 그리 많으냐? 내 이익만을 생각하고 남에게 불편을 주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 아무 소리 말고 가시나무를 치우도록 해라.

 

하고 말하였다.

 

그렇지만 본디 이 길이 없었다면 불편하더라도 돌아다녔을 것이 아닙니까?

그야 그렇지. 하지만, 내가 좀 덜 수확하면 온 마을 사람들이 편리할 게 아니냐?

불편한 것을 고치는 건 좋지만 한 사람의 이익을 위해 여러 사람을 불편하게 해서야 되겠느냐?

 

이 말에 하인은,

 

, 나리도....... 마을 사람들이 나리의 고마움을 알아나 줄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투덜거리며 가시나무를 치웠다.

 

어느 해 봄이었다. 가뭄이 들어 논바닥이 메말라 온 마을 사람들이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비가 조금 내렸다. 평지의 빗물은 곧 땅 속으로 스며들고 말았지만 산골짜기의 물은 도랑물을 이루어 흘러내렸다.

마침 이황 대감 집 논이 맨 위쪽에 있어서 논물을 충분히 댈 수 있었다. 하인은 괭이를 가지고 나가 조금이라도 더 많이 물을 대려고 논둑을 손보아 아래에 있는 논으로 물이 흘러들지 못하도록 탄탄하게 막아 버렸다.

 

이것을 본 이황이 하인에게 말하였다.

 

물고를 터서 아래 있는 논에 물을 대 주어라.

, 나리도....... 지금 우리 논도 말라서 모를 낼지 말지 하는데 남의 논의 물 걱정을 할 겨를이 어디 있습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 우리 집보다 더 딱한 칩이 많은 결 모르느냐? 우리가 좀 더 어렵게 되더라도 좋으니 어서 물고를 터라.

 

나리, 참 딱도 하십니다. 나리의 어지신 마음씨를 누가 알아주기나 합니까? 동네 사람들은 고마워하기는커녕 나리를 흉 볼게 뻔합니다.

 

남이 흉을 보면 어떠냐? 오직 내가 배운 바를 행동으로 옮기고, 옳은 바대로 나가면 되는 게다. 옳고 그름을 알고도 그대로 행하지 않으면 학문을 한 보람이 없는 거란다. 그러니, 그런 흉은 흉이 아니니 마음 쓸 필요가 없다.

 

하인은 불만스러웠지만 할 수 없이 물고를 텄다.

 

이황은 배운 바를 그대로 실천해야만 학문을 올바르게 익혔다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이처럼 스스로 배운 바를 실천하기에 힘썼다.

 

출전<불교설화전집>

 

 

李子脩(이자수) 공의 묘비명

 

 

李子脩(이자수) 墓在 府西20里 兜率院 北 沙理谷 坎坐 禽向. 眞城人.

 

안동시에서 예천 쪽으로 약 8Km 가다가 서후면 명리 북쪽으로 꺾어 2km 지점에 松安君(송안군) 묘소가 있다. 도로변에 새로 세운 송안군 유허비도 있다.

공은 明書業(명서업)에 급제, 그 후 홍건적 토벌에 공을 세우고 송안군에 봉군되어 벼슬이 판전의시사에 오르니 이때부터 眞城(진성) 이씨 가문에 기틀이 다져지게 된다.

묘비는 처음 만력 28(선조 33.1600) 2월에, 7대손 東巖(동암) 詠道(영도)8대손 松潤(송윤) 庭檜(정회)가 건립하였으나 오랜 세월에 마모되어 314년 후인 계축(1913) 10월에 20대손 承杰(승걸)이 다시 세웠다.

 

碑文

在府西兜率院北沙理谷卨向 退陶先生五代祖 竭陰公 諱子脩 眞城縣人 考曰碩 縣吏中生員 贈密直司卽李氏之始祖也 公登第麗末討紅巾賊有功 封松安君 使至 通憲大夫 判典儀寺事始來安東 二男 長曰 言具 工曹參議 次曰 云候 書雲副正 贈司僕寺參議 生三男 長養恭 次養儉郡守 次養浩 養恭生二男 曰思聃 曰希聃 養儉生三男 長基聃 次如聃 次從聃 如聃生三男 曰允元 曰允貞 從聃生二男 長允智 次允綱 副正生一男 曰禎 中直大夫善山府使 贈嘉善生三男 長曰遇陽 武科仁同縣監 次曰興陽 訓練參軍 次曰繼陽 成均進士 贈資憲 縣監 生一男 曰哲孫承義副尉 生二男

長壎 敦勇校尉 次堪 奮順校尉 參軍生三男 長曰垠 次曰壕 次曰垓 垠生一男 曰希侗 壕生二男 長曰希淸 忠順衛 次曰希明 忠順衛 進士生二男 長曰埴 成均進士 贈崇政 次曰堣 文科戶曹參判 進士生六男 長曰潛 次曰河 訓導 次曰漪 次曰懺 文科大司憲 次曰澄 察訪 次曰滉 文科判中樞府事 贈領議政諡文純 參判生一男 曰壽苓 察訪 自是以後世代寢遠 無慮百餘人不可勝載 公墓在府西兜率院後洞 舊無碣上下未辨考妣 七代孫 正郞 詠道 八代孫 縣監 庭檜 謀諸族人 略記世系立石于 二墓之間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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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안군 이자수 묘

()의 서쪽 도솔원 북쪽, 사리곡 이향,

퇴도선생 5대조 갈음(碣陰)공의 휘는 자소이고 진보 현 사람이다. 아버지는 ()인데 현리로 생원시에 합격했으며 밀직사에 증직되었으니 이씨의 시조이다.

()은 과거에 급제하여 고려 말 홍건적을 토벌할 때 공을 세워 송안군에 봉해졌다. 벼슬은 통헌대부 판전의시사에 이르렀다. 처음 안동으로 왔을 때 2남이 있었으니 장자는 운구로 공조참의이고 차자는 운후로 서운부정이며 사복정에 증직되었다.

참의(운구)3남을 두었는데 장자는 양공이고 차자는 양검인데 군수이고 셋째는 양호이다. 양공은 2남을 두었는데 사담과 희담이다. 양검은 3남을 두었으니 장자는 기담이고 차자는 여담이며 셋째는 종담이다. 여담은 3남을 두었는데 윤원, 윤형, 윤정이다. 종담은 2남을 두었는데 장자는 윤지이고 차자는 윤강이다. 부정은 1남을 두었는데 이름이 정이며 중직대부로 선산부사를 지냈으며 가선의 증직을 받았다.

부사는 3남을 두었으니 장자는 우양으로 무과 출신하여 인동현감을 지냈고, 차자는 흥양으로 훈련참군을 지냈으며, 셋째는 계양인데 성균 진사로 자헌을 증직으로 받았다. 현감(우양)1남을 두었으니 철손이며 관직은 승의부위이다. 철손은 2남을 두었는데 장자는 훈으로 돈용교위이고 차자는 감으로 분순부위이다. 참군은 3남을 두었으니 장자는 은이고 차자는 호이며 셋째는 해이다. 은은 1남을 두었는데 희동이다. 둘째 호는 2남을 두었는데 장자는 희청으로 충순위이고 차자는 희명인데 역시 충순위이다.

진사(계양)2남을 두었다. 장자는 식으로 성균 진사이며 숭정에 증직되었다. 차자는 우인데 문과 출신하여 호조참판을 지냈다. 진사()6남을 낳았다. 장자는 잠으로 충순위이고, 둘째는 하인데 훈도이고, 셋째는 의이며, 넷째는 해인데 문과 출신하여 대사헌을 역임하였다. 다섯째는 징인데 찰방이고, 여섯째는 황인데 문과 출신하여 판중추부사를 역임하였고 영의정에 증직되었으며 시호는 문순이다.

참판()1남을 두었으니 수령이며 찰방이다. 이후로 세대가 멀어질수록 자손이 번성하여 무려 백 여 인에 이르므로 다 기록할 수 없다. 공의 묘는 안동부의 서쪽 도솔원 뒷 골짜기에 있는데 갈석이 없는 까닭에 위아래 중 어느 것이 아버지 쪽이고 어느 것이 어머니 쪽인지 조차 구분하지 못하였다.

이에 7대손인 정랑 영도와 8대손인 현감 정회가 여러 문중 사람들과 상의하고 세계를 간략하게 기록하여 2묘의 사이에 세운다.

 

 

 

李瀣(이해)의 묘갈명

 

 

李瀣(이해) 燕山君 2年 丙辰(1496)~ 明宗 5年 庚戌(1550) 55.

字 景明. 號 溫溪. 眞城人

 

공의 묘소는 온계골 못 안에 있다. 공의 묘 앞에는 아우 퇴계가 찬한 비를 융경 3년 기사(전조 2, 1569) 8월에 세웠으니 숙종 신미(1692)에 증직으로 이조판서, 정조 경신(1784)贈諡(증시) 貞愍(정민)이 하사되어 기사년 후 352甲辰(1980)에 개수한 貞愍公溫溪李先生之墓(정민공온계이선생지묘)가 새겨져 있다, 그러나 구비의 아름다운 옥개석은 옛 비를 상상 할 수 있게 한다.

맏아들 ()은 명정 원년 공이 성절사로 명나라에 갈 때 데리고 갔는데 通州(통주)에서 몰하였다. ()의 시에 白鷺波萬里 黃鶴月千秋 憔悴三韓客 登臨淚不收라는 구절은 명나라 사람들도 탐복 했다.

둘째 ()은 공의 사후 廬幕(여막) 3년 후 사마시에 합격하고 知禮(지례) 현감이 되었다. 사후에도 공의 階下(계하)에 묻혔는데 碣銘(갈명)은 영의정 李恒福(이항복) 찬이다. 正宗(정종) 때 영의정 蔡濟恭(채제공) 찬의 신도비는 宗宅(종택) 옆에 비각을 지어서 수립하였다.

 

神道碑

贈資憲大夫吏曹判書行嘉善大夫禮曹參判兼同知春秋館事五衛都捴府副捴管溫溪李公神道碑銘

 

嗚呼當明宗乙巳士禍延四五年當時事尙忍言哉明廟在冲年賊臣芑元衡構煽羅織端人正士鮮有不內之罟擭宗社之不亡天也國是旣定之後人孰不扼腕裂眦而於痛惜溫溪李公尤有甚焉葢公退陶先生之兄也自少志同道合當世有金昆玉友之稱方公之遊宦京師退陶有共約靑山之詩而公嘗曰仕宦而至二品布衣之榮然余無樂乎是矣其志之所存可知若使事君盡節復尋初服以究主靜之業則河南兩程之稱未必專美於古而凶燄所焚崑玉混之後學之齎痛茹恨豈直爲邦國疹瘁而已也初仁宗新卽位八域想望至治而右相芑所爲多凶囂公以大司憲劾之獻納李致與焉居五年公出按忠淸節李洪男誣告其弟洪胤有逆謀魚肉忠州人獄多濫朝廷降忠州爲維新縣以李致知縣事洪男者曾任天曹郞坐其父若氷死於禍被謫至是謂洪男以義滅親議復用州民崔賀孫者覬欲襲洪男以饕利自謫籍逃竊取州人鄕會文將走京上變覺李致上其事觀察營請訊問公可之擬待得其情聞諸朝初訊而賀孫斃非公所料也洪男詣官庭推其弟籍産當否公於廣中唾之洪男怨無所不至司諫李無疆芑鷹犬也元虎變者爲洪男之妻之兄而與無疆交甚切於是洪男嗾虎變及虎變之叔父大司諫繼儉捏公於無疆無疆故與公同史職而公薄其行不一顧固嗛公旣得虎變欲藉是悅芑心逞已憤遂踴躍以告芑芑爲之謀益深明年庚戌芑上疏追論具壽聃公歎曰大臣熒惑聖聽重士林禍時事不其殆歟芑積憾挾新憤眴臺閣無疆繼儉應聲起始誣公前在忠營私漏逆黨田人語無實又誣公聽李致杖殺賀孫爲護逆滅口計猶恐獄不急廼言公與具壽聃爲朋比壽聃甞以諫官欲擊去芑芑風羣不逞捃摭論以死以其所坐有觸上語遂指公爲某黨欲以激怒上於是公與李致同下詔獄拷掠甚酷李致死公亦危及死人或言若誣服可得不死公慨然曰無所犯而僞服求活吾所耻也元衡爲推官勒具供稱上旨脅署公神色如平日徐曰事皆非所知不敢署草獄中疏欲上元衡拒不入已而上察其冤命流甲山府舁及楊州店舍刑毒發以八月十四日卒享年五十五九月返櫬溫溪故里用十二月某甲塟于縣北燕谷坐庚之原公諱瀣字景明眞寶人六世祖碩起縣吏中進士贈密直使世稱有隱德其子曰子脩仕麗末平紅巾賊以功封松安君高祖諱云侯軍器寺副正曾祖諱禎甞拓寧邊藥山城勞勣著卒善山府使祖諱繼陽國子進士自安東卜禮安之溫溪居後贈吏曹判書考諱埴進士早卒贈左贊成妣贈貞敬夫人春川朴氏司正緇之女公早孤與退陶同受業叔父松齋公文辭夙達人莫有先之慕齋金先生一見奇之謂松齋曰兒異器善護之乙酉擧進士戊子中文科選入承文院俄薦爲翰林逌奉敎陞典籍轉工禮二曹郞自是華聞彌大翔于顯班於諫院正言司諫大司諫於憲府執義大司憲春坊司書玉署應敎典翰直提學政府檢詳舍人吏曹爲佐郞正郞濟用司僕寺爲正政院則自同副至都承旨禮曹爲參判京兆爲右尹隷院判決事摠府副摠管內庸也於外觀察黃海忠淸兩道奉命宣慰日本使臣充聖節使朝京師又嘗廉北關監嶺南賑北關道踔遠多阻險公存訪民疾苦不憚迂僻民大歡躍其監賑也計度區畫悉中機宜餓戶賴活侍若慈母上賜書勞之其按察兩營律以淸簡一路寧謐此公之當官盡職而猶屬賢者之疏節也少嘗與金安老同里巷安老屢相汲引終不爲之屈當無疆等旁午構捏禍機朝暮不測而都憲宋世珩欲見公世珩附麗芑者或勸公一往見以弭禍公曰我知其人矣况死生在天造門乞哀不亦鄙乎其守正不撓不以禍福動其心如此公歿數年芑罪竆惡極卒憂廢死無疆亦竄斃宣廟初元繼明宗志雪公冤給還爵秩肅宗十七年又贈大冢宰太學士天道於是乎定矣退陶誌公墓有曰公德性寬厚器量恢弘友于兄弟其處家煕煕然子弟婢僕有過未嘗形于嗔恚仲兄漪早卒取其孤撫視敎訓至于成立親舊之急必極力而濟之平生無害人之心人望之知其爲吉人君子嗚呼退陶所以紀公之德者不溢不衍有若分金秤上秒忽靡差詳味而得其人足矣後學安敢妄有所架疊也公配貞夫人延安金氏復興之女生五男一女男宓女適崔德秀縣監宓隨公聖節行道卒通州無子寗縣監無子以有道嗣女長適李彦直監察次適李禮福㝯縣監男崇道正道有道女適李敬元都事寘早夭以純道嗣寭工曹佐郞男周道陵寢郞味道護軍深道士道直道崔德秀男琛奉事壻李忠可郡守李慶涵承旨曾玄以下多不可勝載今上八年贈公謚曰貞愍命禮官祭告退陶君子曰有是哉一世之詘萬世之伸也公之七世孫前正言級以訥隱李公所撰狀授濟恭曰願徼惠於子以賁吾先祖麗牲之石濟恭非其人只得依退翁文書之以洩憤快之意兼寓景慕之忱云銘曰

天有淑氣萃于眞城金昆玉友曰篤其生公在朝廷鳳瑞麟祥忘躳嫉姦白簡橫霜藍鬼吮血腹有利鋩惟我明廟時維在冲太陽懸空柰彼陰虹凶吻密鼓衆醜攸同索性羅織鼎鑊傍烘幽幽犴狴血字在抱閶闔路阻虎狺豺哮死吾不愧不死恃天天王聖明恩旨亟宣大德曰生有北奚逖維楊之曲柰何皋復士林呼咷疇不身百鬱鬱冤氛矗彼南服天道好斡不十年復巨奸脫距孤忠始白贈秩光光美諡焯焯在公何憾吾道之慽程思朱情恨不塤箎溫溪幽咽秋栢在玆我銘孔昭刻于豐石俾百世人樂善懲惡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 領經筵事監春秋館事原任 奎章閣提學 蔡濟恭

 

 

증이조판서정민공온계이선생신도비명(서문을 함께 )

아아 명종 을사년(1545)부터 사화가 4.~5년이나 만연하였다. 당시 일을 어찌 차마 말하겠는가. 명종이 나이가 어렸을 때인데 역신 기기(李讀)와 윤원형(尹元衡)이 얽어서 선동하고 옭아 짜 넣어서, 단아한 사람과 정직한 선비로서 그 그물에 옭아 들지 않은 자가 드물었다. 이러한 때에도 나라(宗社)가 망하지 않은 것은 천운이었다.

국시(國是)가 이미 확정된 후에 누구인들 奸人(간인)에 대한 울분에 주먹을 불끈 쥐고 눈초리가 찢어지지 않았으리. 그 중에도 온계 이공을 애석하게 여김이더욱 심했다. 대개 공은 퇴도 선생의 형이다. 소년 적부터 뜻이 같고 도도 같아서 당세에 금옥 같은 형제라는 일컬음이었었다. 공이 한창 서울에서 벼슬할 때에 퇴도 선생의 시에 함께 청산을 기약한다.라는 말이 있었다.

그리고 공은 일찍이, 仕宦(사환)해서 2품에 이르렀으니 포의(布衣)로서 경광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에 즐거움이 없다.했으니 그 뜻이 있는 바를 알 수가 있다. 만약 임금을 섬기면서 충절을 다하고, 다시 처음 옷(初服一)을 찾아서 주정(主靜)하는 공부를 궁구(窮究)토록 했더라면 하남 양정씨(河南 兩程氏)라는 아름다운 일컬음이 반드시 옛적에만 오로지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흉한 불꽃이 타는 곳에 崑崙山(곤륜산)이 섞여 들었으니, 후학들이 슬픔을 안고 한을 머금음이 어찌 바로, 나라를 위해 병들었던 것뿐이겠는가.

당초에 인종께서 즉위하자 8()이 지극한 다스림을 희망했는데, 右相(우상) 이기의 하는 바예 음흉하고 어리석은 것이 많았다. 공이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탄핵했고 헌납 이치가 참여하였다. 그 후 5년을 있다가 공이 충청도에 安節(안절)하였다. 이홍남이, 그 아우 흉윤이 역모(逆謀)에 참여했다고 고발하여 충주 사람을 결단 냈었는데 옥사가 많이 번졌다. 조정에서 충주를 강등시켜서 유신현으로 만들고 이치를 지현사(知賢事)로 삼았다.

흥남은 일책이 이조 낭관을 역임한 자인데, 그 아비 약빙(若氷)이 사화에 죽게 되어, 자신은 귀양을 갔다. 이때에 와서, 흥남이 대의로써 사사로운 정의(情誼)를 없앴다는 것으로써, 논의하여 다시 서용(敍用)하였다. 고을 백성으로 최하손이란 자가 기회를 넘보다가, 흥남을 본따서 이()를 탐내고자 하였다. 적소(謫所)에서 도망쳐 와서 고을 사람의 향회 문서를 훔쳐 가지고 서울에 달려가서 상변(上變)하려 하다가 발각되었다. 이채가 그 사건을 관찰영문(觀寮營門)에 보고하여 신문(訊問)하기를 청하므로 공이 허가하였다. 그 실정을 알아내기를 기다려서 조정에 보고하려 했는데 처음 심문에 하손이 죽을 줄은 공이 요량한 바 아니었다. 흥남이 관정(官庭)에 나와서 그 아우의 살림 중에 적몰이 당연한 것과 않은 것을 따지는 것이었다. 공이 많은 사람이 있는 좌석에서 비웃었더니 흥남이 듣고 원망하는 말이 이르지 않는 데가 없었다.

그때 사간 이무강은 기의 조개(雁犬)이고 원호변이란 자는 흥남의 처남인데 무강과 사귐이 매우 친밀하였다. 이리하여 호변 및 호현의 숙부인 대사간 원계검(元繼儉)을 부추겨서 무강에게 공의 허물을 주워 얽었다. 무강은 전일에 공과 더불어 사직(史職)을 함께 했는데 공은 그의 행실을 싫어해서 한 번도 돌아 보지 않았더니 공을 섭섭하게 여겼다. 이미 호변의 부추김을 받자, 이것을 빙자해서 기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제 분함도 풀고자 하였다. 드디어 뛰어 가서 기에게 알리니, 기의 꾸미는 꾀가 더욱 심중하였다. 그 다음해 경술년(1550)에 기가 소장을 올려서 구수담(具壽聘)을 논박(論騷)하므로, 공이 탄식하면서, 대신이 임금의 들음을 의혹 되계 해서 사림의 화액(禍厄)을 중하게 하니 세상 일이 어찌 위태롭지 않은가.하였다. 기가 쌓인 감정에다 새 분함을 끼고, 대각(臺閣)에게 눈짓하니 무강과 계검이 소리에 응해 일어났다. 처음에는 공이 충주 감영(監營)에 있을 때, 역당(逆黨)의 전지와 비복(婢錢)을 사사로이 누락시켰다는 것으로 모함했으나, 말에 실증(實證)이 없었다. 또 공이 이치의 말을 듣고 하손을 장살(杖殺)한 것은 역적을 두둔해서 말을 못하게 한 계책이라고 모함했으나 오히려 옥사(獄事)가 빨리 진행되지 않을까 염려하였다. 이에 공이 구수담과 한 당패여서 두둔한다고 말했다. 구수담이 일찍이 간관(諫官)으로 있으면서 기를 공격해 없애고자 하였다. 기는 부정(不廷)한 무리에게 없는 사실을 주어 모우도록 위압(威壓)하여 사형으로 논단하였다. 그가 죄를 당한 것은 임금을 범한 말이 있었다는 것인데, 드디어 공을 그 당패로 지목하여 임금의 노여움을 격발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공은 이치와 함께 조옥(詔獄)에 갇쳤고, 고문이 매우 혹독하여 이치는 죽고 공도 위태하여 죽게 되었다, 사람들이 혹 거짓이라도 자복할 것 같으면 죽지는 않을 수가 있다.하였다. 공은 개연히, 범한 바가 없는데 거짓으로 자복해서 삶을 구하는 것은 내가 부끄러워 하는 바이다.'하였다. 원형(元衡)이 추관(推官)으로 되어 억지 공초(供招)를 갖추고 임금의 뜻이라고 일컬으면서 서명하도록 협박하였다. 공은 신색이 평일 같으면서 천천히, 사건은 모두 아는 바가 아니니, 감히 서명하지 못한다.하였다. 옥중에서 소장을 초해 올리고자 했으나, 원형이 거절하고 임금에게 드리지 않았다. 멀지 않아서 임금이 그의 원통함을 살피고 갑산부(甲山府)에 유해하도록 명했다. 가마에 메여서 양주점사(楊州店舍)에 도착했으나 형독(刑毒)이 터져서 814일에 별세했는데 쉰다섯 살을 누렸다. 9월에 온계 옛 마을에 반구(返柩)해서 섣달 12일 날 현() 북쪽 연곡(燕谷) 경좌(庚坐) 원에 장사하였다.

공의 휘는 해, 자는 경명이고 진보가 본관이다. 육대조 석()이 고을 아전으로서 진사시에 합격했고 밀직사로 중직 되었는데 세상에서 숨은 덕이 있다고 일컫는다. 그 아들이 자수(子修)이고 고려 말에 벼슬했다. 홍건적을 평정한 공으로써 송안군(松安君)으로 봉함을 받았다. 고조 취 운후(云候)는 군기시부정(軍器寺副正)이고 증조 취 정()은 일찍이 영변 약산성(寧邊 藥山城)을 개척해서 공로가 현저했으며 선산 부사로 있다가 죽었다. 조부 계양(繼陽)은 국자감진사(國子監進士)인데 안동에서 예안 온계로, 터를 잡아 옮겨 살았고 후일에 이조판서로 증직되었다. () 휘 식()은 진사로서 일찍 죽었으며 좌찬성으로 증직되었다. ()는 정경부인으로 추증되었는데 춘천 박씨 사정(司正) 휘 치()의 따님이 다. 공이 아버님을 일책 여의고 퇴도(退陶)와 함께 숙부 송재공에게 수업했는데 문사가 일직 성취되어서, 앞서는 사람이 없었다. 모재(慕齋) 김선생이 한번 보자 기이하게 여겨서 송재에게, 이 아이는 기이한 재기(才器)이니 잘 보호하게.하였다. 을유년(1525) 진사시에 합격했고 무자년(1528) 문과에 합격해서 승문원에 뽑혀 들었다가 잠깐 후에 한림으로 천거되었다. 봉교(奉敎)를 거쳐 전적(典籍)으로 승진했고 공조·예조 두 곳 좌랑으로 전임했다. 이로부터 빛난 소문이 더욱 커져서 높은 반렬(班列)이 너울 거렸다. 사간원에는 정언(正言사간(司諫) 대사간을, 사헌부에는 집의(執義대사헌을, 춘방(春坊)에는 사서(司書), 옥서(玉署)에는 응교(應敎전한(典翰직제학을, 의정부에는 검상(檢詳사인(舍人)을 역임했고 이조에는 좌랑·정랑을 했으며 제용감(濟用監)과 사복시(司僕寺)에는 정()을 했다. 승정원에는 동부승지에서 도승지에 이르렀고, 예조에는 참판을, 경조(京兆)에는 우윤(右尹)을 했으며, 장예원(掌隸院)에는 판결사, 도총부(都總府)에는 부총관을 했는데 내직이었고 외임(外任)으로는 황해도와 충청도 관찰사를 했다. 왕명을 받들어 일본 사신을 선위(宣慰)했고 성절사(聖節使)로 충원되어 북경에 가기도 했다. 또 일찍이 북관(北關)을 염찰(廉察)했고 영남 진제(賑濟)를 감독했는데 북관은 길이 높고 밀어서 막히고 험한 데가 많았으나 공은 백성의 질고(疾苦)를 위문하여 멀고 궁벽짐을 꺼리지 않으니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여 날뛰었다. 진제를 감독하면서 계산하고 구획한 것이 시기와 사정에 알맞아서 굶주린 백성이 삶을 힘입어서 자모(慈母)같이 의지하니 임금이 서찰(書札)을 내려서 위로하였다. 두 감영(監營)을 안찰할 때에는 청렴과 간결함으로써 단속하니 온 도()가 평안하였다, 이런 것은 공이 관직을 담당하여 직분을 다 한 것이나 오히려 어진 자의 대범한 마디에 속한다. 젊었을 때 김안로(金安老)와 한 마을에 살았는데 안로가 공을 여러 차례 도와서 끌어 올리려 했으나 끝내 굽히지 않았다. 무강 등이 어울려 얿어 꾸며서 화색(禍色)이 아침저녁을 요량할 수 없는 때였다. 도헌(都憲) 송세형(宋世珩)이 공을 만나 보고자 했는데 기에게 붙은 자였다. 어떤 자가 공에게 한번 가 보아서 화를 늦추기를 권했다. 공은, 나는 그 사람됨을 안다. 하물며 죽고 삶은 하늘에 있는데 그 문간에 가서 살려 주기를 애걸함은 또한 더럽지 않은가.하였다. 그바름을 지켜서 흔들리지 않고 화복(禍福)으로써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공이 별세한 지 두 해만에 기는 죄가 한이 없고 악이 지극하여, 마침내 폐고(廢錮)되어 걱정하다가 죽었고 무강도 또한 귀양가서 죽었다. 선묘(宣廟)가즉위한 첫해에 명종의 뜻을 이어서 공의 원통함을 씻고 작질(爵秩)을 돌려주었다. 숙종 17년에는 대총재(大冢宰태학사(太學士)로 추증했는데, 천도가 이에서 정해졌다.

퇴도가 공의 묘에 지문(誌文)하면서, 공은 덕성이 너그럽고 도량이 넓었다. 형제간에 우애하여 집에 있으면 화락하였고 자제와 비복들에 허물 있어도 일찍이 노여움을 나타내지 않았다. 중형(仲兄) ()가 일찍 죽자 그 아들을 데려다가 무애(撫愛)하고 교훈해서 성취시켰다. 친구가 급한 경우를 당했으면 반드시 힘껏 구제했고, 평생에 남을 해치려는 마음이 없으니 사람들이 바라만 보아도 길인군자(吉人君子)인 줄을 알았다.하였다.

아아, 퇴도가 공의 덕을 기록한 바는 넘치지도 방자하지도 않았다. 금을 저울 위에 갈라놓은 것처럼, 초홀(秒忽)도 어긋남이 없으니 자세히 음미하면 그 사람을 알기에 족할 것이다. 후학이 어찌 감히망넘되게 걸쳐 겹칠 바가 있겠는가.

공은 정부인 연안 김씨와 짝했다. 부흥(復興)의 따님이고 아들 다섯 딸 하나를 낳았다. 아들은 복((((()이고 딸은 현감 최덕수(崔德秀)에게 시집갔다, 복은 공의 성절사 행차를 따라 갔다가 통주(通州)에서 죽었고 아들이 없다. 영은 현감이고 아들이 없어 유도(有道)를 후사로 삼았다. 맏딸은 감찰 이언직(李彦直)에게, 다음 딸은 이예복(李禮福)에게 시집갔다. 교도 현감이고 아들은 숭도(崇道정도(正道유도(有道)이며, 딸은 도사 이경원(李敬元)에게 시집 갔다. 치는 일찍 죽어서 순도(純道)가 후사로 되었다. 혜는 참의로 추증되었는데 아들 주도(周道)는 능침랑(陵寢郞)이고 미도(味道)는 호군(護軍)이며 그 다음 심도(深道사도(士道직도(直道)이다. 최덕수의 아들 침()은 봉사(奉事)이고 사위는 군수 이충가(李忠可)와 승지 이경함(李慶涵)이다. 그리고 증손·현손 이하는 많아서 이루 기재할 수가 없다. 지금 임금 8년에 공에게 정민(貞愍)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예관(禮官)에게 명해서, 퇴도군자에게 제사하여 고하면서,한 세상의 굽힘은 만 세대의 펴임이었다. 하였다. 공의 7대손 전정언(前正言) (), 눌은(訥隱) 이공이 지은 행장을 제공(濟恭)에게 주면서, 자네에게 혜택을 요구해서, 우리 선조의 여생(麗牲)하는 돌을 빛나게 하기를 원한다.하였다. 제공이 그 일에 적당한 사람은 아니나, 다만 퇴옹(退翁)의 글에 의해서 분하고도 통쾌한 뜻을 밝하고 또 겸해서 우러러 사모하는 뜻을 붙인다. ()하기를,

 

하늘에 있던 밝은 정기가,

진성 (眞城)씨에 모였다.

금같은 옥같은 형과 아우가,

돈후(敦厚)한 자질로 태어났었다.

공께서 조정에 벼슬하실 제,

()같이 기린(麒麟)같이 상서로웠다.

제 몸 잊고, 간사함을 미워하여서,

백간(白簡)에 서리()가 나는 듯했다.

남귀(藍鬼)가 피를 빨아서 먹고,

뱃속에 날카로운 칼날 있었다.

생각컨대 우리 명묘(明廟)께서는,

그때에 나이가 오직 어렸다.

태양이 하늘에 달려 있는데,

어찌해서 저 무지개 음흉(陰凶)했던가

흠칙한 주등이를 살짝 별리니,

더러운 것들이 함께 하였다.

재빠르게 결정하고 얽고 옭아서,

옆에는 가마솥에 불을 피웠다.

깊숙하고 깊숙한 감옥 속에서

피로 적은 문자를 안고 있을 뿐.

창합(閶闔)에 올릴 길이 막히니

호표(虎豹)들이 지껄이며 으르릉댓다.

나 죽더라도 부끄럼 없고,

죽지 않음도 하늘 믿는다.

어리신 임금이 성명(聖明)하시어

은지(恩旨)를 바삐 선포하였다.

큰 덕으로 살려 주라하시어,

북관(北關)으로 귀양 가게 됐는데,

저 양주 한 굽이에서,

고복(皐復)하니 어이할이거나.

사림이 슬퍼하여 부르짖으며,

누군들 제가 죽음을 모두 원했다.

답답하고 원통한 기운,

남복(南服)에 높이 솟았다.

천도(天道)는 옮기기를 좋아하여서,

십년이 못되어서 회목하였다.

큰 간인(奸人) 발톱을 뽑자

외롭던 충성이 처음 밝았다.

추증한 작질이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시호가 밝게 빛난다.

공에게야 무엇이 유감되라만,

우리의 도()가 슬플 뿐이다.

정자(程子)의 사상과 주자(朱子)의 뜻을

훈지(壎篪)를 못했음이 한스러워라.

온계가 그윽히 목 메이는데,

가래나무 잣나푸가 여기에 있다.

내가 지은 명문(銘文)이 매우 밝으니,

커다란 돌에다 깊이 새겨서

백대토록 후세 사람들에게

() 즐기고 악은 징계토록 하노라.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겸영경연사 감춘추관사 임규장각제학 채제공

 

 

 

李滉(이황) 墓碣銘(묘갈명)

 

 

李滉(이황) 燕山君 7年 辛酉(1501)~ 宣祖 3年 庚午(1570) 70

字 景浩. 號 退溪. 眞城人 松安君 子脩

 

퇴계선생은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이다. 선생은 중종 29년 갑오(1534)에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左贊成(좌찬성) 典文衡(전문형)으로 벼슬이 判中樞(판중추)에 이르렀으나 관직보다는 학자로서 더 알려져 있다.

선생이 선조 3년에 돌아가셨는데 유언으로 묘 앞에는 退陶晩隱眞城李公(퇴도만은진성이공)이라는 여덟 자로 비석을 세우라 하고 나라의 禮葬(예장)도 사양하였다.

특히 비문에 대해서는 스스로 명을 지어 혹이나 문인들이 장황하게 허식으로 사실을 왜곡하는 것을 경계하였다.

下溪(하계) 정지산 남록에 선생의 묘소를 찾는 이는 위 선생의 유게에 의하여 墓傍(묘방)에 세워진 短碣을 대하고 나면 스스로 고개가 숙여질 것이다.

舊碑는 선조 10년 정축(1577) 2월에 高峯(고봉) 奇大升(기대승)이 찬한 것을 梅軒(매헌) 琴輔(금보)의 글씨로 세계 세웠으나 세월이 오래 되어 자획이 마모되자 고종 42년 을사(1905)改刻(개각)하여 세웠다.

선생 묘소의 신도비가 없는 것도 선생의 遺命(유명)이 장례를 간소하게 하라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되는데, 근래 호화문묘를 만드는 사람들게 경계가 될 것이다.

 

退陶晩隱眞城李公墓碣

墓碣銘先生自銘高峯奇大升敍其後

 

生而大癡壯而多疾中何嗜學晩何叨爵學求猶邈爵辭愈嬰進行之跲退藏之貞深慙國恩亶畏聖言有山嶷嶷有水源源婆娑初服脫略衆訕我懷伊阻我佩誰玩我思古人實獲我心寧知來世不獲今兮憂中有樂樂中有憂乘化歸盡復何求兮

隆慶四年春退溪先生年七十再上箋乞致仕不許又申乞致仕不許十二月辛丑先生卒訃聞上震悼命贈領議政葬用議政禮遠近 聞之無不齎咨歎惜相與吊哭明年三月壬午葬家東搴芝山南支先生姓李氏諱滉字景浩嘗卜居退溪因以自號後構書堂陶山又號陶叟其先眞寶縣人六世祖碩起縣吏中司馬試贈密直使有子曰子脩官至判典儀寺事討紅賊有功封松安君移居安東周村高祖諱云侯軍器寺副正贈司僕寺正妣淑人權氏曾祖諱禎善山都護府使贈戶曹參判妣貞夫人金氏祖諱繼陽成均進士贈吏曹判書移寓禮安居溫溪里妣貞夫人金氏考諱埴成均進士累贈崇政大夫議 政府左贊成妣義城金氏春川朴氏俱贈貞敬夫人先生生未晬而孤少受學于叔父松齋公旣長劬書厲志益自刻苦嘉靖戊子進士甲午登第爲承文院副正字轉博士遷成均館典籍戶曹佐郞丁酉冬丁內艱服闋拜弘文館修撰歷司諫院正言司憲府持平刑曹正郞弘文館副校理校理兼世子侍講院文學議政府檢詳轉舍人司憲府掌令成均館司藝兼侍講院弼善司諫院司諫成均館司成乞假展墓明年甲辰春以弘文館校理召還除左弼善遷弘文館應敎典翰病免爲 司饔院正復授典翰李芑啓請削官已而芑又請勿削授司僕寺正丙午春乞假葬外舅以病見遞丁未秋授應敎被召旣至病免戊申正月出守丹陽郡換豐基己酉冬病辭徑歸被劾奪二階壬子夏拜校理承召還朝除司憲府執義改副應敎陞秩成均館大司成病免復爲大司成爲刑曹參議兵曹參議俱以病免爲僉知中樞府事乙卯春在告解職雇舟東歸拜僉知中樞拜弘文館副提學連被召命皆辭以病戊午秋上疏乞免收召御批不許入都謝恩拜大司成俄拜工曹 參判累辭不許明年春乞假歸鄕三上狀請免授同知中樞府事乙丑夏上狀陳懇解官以居下旨特召復授同知中樞丙寅正月力疾登道陳狀乞骸道拜工曹判書又兼大提學遂力辭新命還家竢罪遞授知中樞府事丁卯春以詔使將至有召命六月入都會明宗昇遐今上嗣服拜禮曹判書辭不許以病免卽東歸十月有召命授知中樞旋以敎書促行具疏力辭戊辰正月拜議政府右贊成又具疏極陳難受之義又下敎書促行上狀懇辭遞爲判中樞府事七 月詣闕謝辭上疏陳六條又獻聖學十圖拜大提學吏曹判書右贊成皆力辭不拜己巳三月上箚乞歸箚四上猶不已上知其不可留引見慰諭命馳驛護遣是月先生至家上狀謝恩仍乞致仕先生寢疾戒子寯曰我死該曹必循例請用禮葬汝須稱遺令陳疏固辭且勿用碑石只以小石題其前曰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略敍世系行實于後如家禮所云可也又曰此事若托人爲之相知如奇高峯必張皇無實之事以取笑於世故常欲自述己志先製銘文而因循未畢藏 在亂藁中搜得用之可也寯旣受戒再上疏辭禮葬不得命遂不敢更辭墓道之表用遺戒刻其銘嗚呼先生盛德大業卓冠吾東者當世之人亦旣知之矣後之學者觀於先生所論著將必有感發默契焉者而銘中所敍尤足以想見其微意也迂愚無狀蒙先生奬厲成就不啻如父母天地之恩而山頹梁壞無所依歸竊念遺戒之言雖不敢違而所以揭阡詔後者亦不可泯其迹敢記其大槩而爲之辭曰先生幼而端序長益涵揉中歲以後絶意外慕專精講究洞朗微妙充積發越人莫 能測而方且謙虛卑遜若無所有蓋其日新上達有不能已者至於出處去就相時度義務求吾心之所安而終亦無所詘焉其所論著反復紆餘光明俊偉粹然一出於正揆諸孔孟程朱之言其不合者寡矣亦可謂建諸天地而不悖質諸鬼神而無疑也嗚呼至哉先生再娶先娶金海許氏進士瓚之女産二男後娶安東權氏奉事礩之女俱贈貞敬夫人子寯奉化縣監早世孫男三人曰安道辛酉生員曰純道曰詠道女二人長適士人朴欐側室子一人曰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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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退溪) 선생 묘갈명(墓碣銘) 명문(銘文)은 선생이 스스로 짓고 아울러 썼다.

 

태어나서는 크게 어리석었고 / 生而大癡

장성하여서는 병이 많았네 / 壯而多疾

중년에는 어찌 학문을 좋아했으며 / 中何嗜學

말년에는 어찌 벼슬에 올랐던고 / 晩何叨爵

학문은 구할수록 멀기만 하고 / 學求猶邈

관작은 사양할수록 몸에 얽히네 / 爵辭愈嬰

세상에 진출하면 실패가 많았고 / 進行之跲

물러나 은둔하면 올발랐네 / 退藏之貞

국가의 은혜에 깊이 부끄럽고 / 深慙國恩

성인의 말씀이 참으로 두려워라 / 亶畏聖言

산은 높이 솟아 있고 / 有山嶷嶷

물은 끊임없이 흐르는데 / 有水源源

선비의 옷을 입고 한가로이 지내니 / 婆娑初服

뭇 비방에서 벗어났네 / 脫略衆訕

내 그리워하는 분 저 멀리 있어 볼 수 없으니 / 我懷伊阻

나의 패옥 누가 구경해 주리 / 我佩誰玩

내 고인을 생각하니 / 我思故人

실로 내 마음과 맞는구나 / 實獲我心

어찌 후세 사람들이 / 寧知來世

지금의 내 마음을 모른다 하랴 / 不獲今兮

근심스러운 가운데에 낙이 있고 / 憂中有樂

즐거운 가운데에 근심이 있네 / 樂中有憂

조화를 타고 돌아가니 / 乘化歸盡

다시 무엇을 구하리 / 復何求兮

 

융경(隆慶) 4(1570, 선조3) 봄에 퇴계 선생은 나이가 70세였는데, 재차 전문(箋文)을 올려서 치사(致仕)할 것을 청했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으며, 가을에 또다시 치사를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12월 신축일에 선생께서 별세하시어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상은 크게 애도하시며 영의정을 추증하고 장례는 의정(議政)의 예를 쓰도록 명하였다. 멀고 가까운 지방에서는 이 소식을 듣고 모두들 슬퍼하고 애석해하며 서로 곡하고 조문하였다. 다음 해 3월 임오일에 집 동쪽의 건지산(搴芝山)에 안장하였다.

선생의 성은 이씨이고, 휘는 황()이며, 자는 경호(景浩)이다. 일찍이 퇴계(退溪)에 집터를 정하여 살고 인하여 스스로 호로 삼았으며, 뒤에 도산(陶山)에다가 서당을 짓고 또 도수(陶叟)라고도 불렀다. 그 선대는 진보현(眞寶縣) 사람이었다. 6대조 석()은 고을의 아전으로서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고 밀직사(密直使)에 추증되었다. 아드님인 자수(子修)는 벼슬이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에 이르렀으며 홍건적(紅巾賊)을 토벌하여 공을 세우고 송안군(松安君)에 봉해졌는데, 이분이 안동(安東) 주촌(周村)으로 이거(移居)하였다. 고조의 휘는 운후(云侯)인데 벼슬이 군기시 부정(軍器寺副正)으로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으며, 고조비는 숙인(淑人) 권씨(權氏)이다. 증조의 휘는 정()인데 벼슬이 선산 도호부사(善山都護府使)로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증조비는 정부인(貞夫人) 김씨(金氏)이다. ()의 휘는 계양(繼陽)인데 성균 진사(成均晉士)로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이분이 예안(禮安)으로 이거하여 온계리(溫溪里)에 거주하였다. 조비는 정부인 김씨이다. 선고(先考)의 휘는 식()인데 성균 진사로 여러 번 추증을 받아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이르렀으며, 선비(先妣)는 의성 김씨(義城金氏)와 춘천 박씨(春川朴氏)로 모두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다.

선생은 출생하신 지 한 돌이 못 되어 부친을 여의고, 어려서는 숙부인 송재공(松齋公)에게 수학하였다. 이미 장성해서는 학문에 힘쓰고 뜻을 가다듬어 더욱더 스스로 각고하였다. 가정(嘉靖) 무자년(1528, 중종23)에 진사가 되고, 갑오년(1534)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었다가 박사(博士)로 옮겼으며,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과 호조 좌랑(戶曹佐郞)을 역임하였다. 정유년(1537) 겨울에 모친상을 당했으며, 그 후 삼년상을 마치고는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에 임명되었다. 그 후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과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형조 정랑(刑曹正郞)과 홍문관부교리 겸 세자시강원문학(弘文館副校理兼世子侍講院文學),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을 지냈으며, 다시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으로 옮기고,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과 성균관사예 겸 시강원필선(成均館司藝兼侍講院弼善),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과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에 임명되었는데, 성균관 사성으로 있을 때에는 휴가를 얻어 성묘하였다.

다음 해인 갑진년(1544) 봄에는 홍문관 교리로 소환되어 좌필선(左弼善)에 임명되고, 홍문관 응교와 전한(典翰)으로 천직되었다가 병으로 면직되었으며, 사옹원 정(司饔院正)이 되었다가 전한에 다시 임명되었다. 이때 간신 이기(李芑)가 삭탈관직하도록 계청(啓請)하였다가 얼마 후 이기가 또다시 삭탈관직하지 말도록 청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임명되었다.

병오년(1546, 명종1) 봄에는 휴가를 받아 외구(外舅)를 장례하고 병으로 체직되었다. 다음 해인 정미년(1547) 가을에는 응교로 임명되고 부름을 받았으나 서울에 도착한 다음 병으로 면직되었다. 무신년(1548) 1월에는 외직으로 나가 단양 군수(丹陽郡守)가 되었다가 풍기(豐基)를 맡았다. 기유년(1549) 겨울에는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곧바로 돌아갔다가 탄핵을 받아 두 품계를 박탈당하였다.

임자년(1552) 여름에는 교리에 임명되어 부름을 받아 조정에 돌아와 사헌부 집의에 제수되었으며, 다시 부응교로 옮겨졌다가 성균관 대사성으로 승진되었다. 그 후 병으로 면직되었다가 다시 대사성이 되고, 형조 참의와 병조 참의가 되었으나 모두 병으로 면직되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을묘년(1555) 봄에 휴가로 있던 중 해직되자 배를 세내어 동쪽으로 돌아왔다. 그 후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며,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에 임명되고 연달아 부르는 명을 받았으나 모두 병으로 사양하였다.

무오년(1558) 가을에는 상소하여 면직되기를 청하고 부르는 명을 거두어 줄 것을 청하였으나, 상은 비답(批答)을 내려 허락하지 않았다. 선생이 도성에 들어가 사은하니 대사성에 임명되고, 얼마 후에는 공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선생은 여러 번 사양하였으나, 상은 허락하지 않았다. 다음 해 봄에 휴가를 받아 고향으로 돌아가고 세 번이나 글을 올려 면직되기를 청하여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을축년(1565) 여름에는 글을 올려 간곡히 사양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 기거하였다. 겨울에 상이 특지를 내려 부르고 다시 동지중추부사에 임명하였다. 병인년(1566) 1월에 선생은 병을 무릅쓰고 길에 올라 글을 올려 치사하기를 청했는데, 서울에 올라오는 도중 공조 판서에 임명되고 또 대제학에 겸직되었다. 선생은 마침내 새로 내린 벼슬을 극력 사양하고 집에 돌아와 죄를 받기를 기다렸다. 그리하여 벼슬이 체직되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정묘년(1567, 명종22) 봄에는 명나라 사신이 서울에 오게 되었으므로 부르는 명이 있었다. 선생은 6월 도성에 들어갔는데, 이때 마침 명종이 승하하고 금상(今上 선조)이 뒤를 이었다. 금상이 선생을 예조 판서로 임명하자, 선생은 사양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그 후 병으로 면직되고 즉시 동쪽으로 돌아왔다. 10월에 부르는 명을 받고 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며, 곧바로 상이 교서를 내려 올라올 것을 재촉하자 선생은 상소를 올려 간곡히 사양하였다.

무진년(1568, 선조1) 1월에 의정부 우찬성에 임명되자, 선생은 다시 상소하여 받기 어려운 의리를 극구 말하였다. 또 교서를 내려 올라올 것을 재촉하자 선생은 글을 올려 간곡히 사양하니 체차되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다. 7월에 선생은 대궐에 나아가 사양하고 글을 올려 6개 조항을 아뢰었으며 또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올렸다. 그 후 대제학과 이조 판서, 우찬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극력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기사년(1569) 3월에는 차자(箚子)를 올려 돌아갈 것을 요청하였는데, 차자를 네 번이나 올리면서 그치지 않았다. 상은 더 이상 만류할 수 없음을 아시고는 인견(引見)하여 타이르시고 역졸로 하여금 보호하여 보내도록 하였다. 이달에 선생은 집에 도착한 다음 글을 올려 사은하고 인하여 치사할 것을 청하였다.

처음에 선생은 병환이 위중해지자 아들인 준()에게 경계하기를 내가 죽으면 예조에서는 반드시 준례에 따라 예장(禮葬)을 하도록 청할 것이니 너는 모름지기 나의 유명(遺命)이라 칭하고 상소하여 굳이 사양하며, 또 비석을 쓰지 말고 다만 작은 빗돌에다가 전면(前面)에는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만 쓰고 세계(世系)와 행실을 뒤에다 간략히 서술하여 가례(家禮)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여야 한다.” 하셨다. 그리고 또 말씀하기를 이 일을 만일 남에게 부탁하여 할 경우 아는 사람 중에 기고봉(奇高峯) 같은 이는 반드시 실상이 없는 일을 장황히 늘어놓아 세상에 비웃음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일찍이 스스로 나의 뜻을 기술해서 미리 명문을 짓고자 하였으나 미뤄 오다가 끝내지 못하고 난고(亂稿) 가운데 보관되어 있으니 찾아서 써야 한다.” 하였다. 준은 이 경계를 받고 선생이 별세하자 두 번이나 상소하여 예장을 사양했으나 허락되지 않자 감히 끝까지 사양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묘도(墓道)의 표()는 유계(遺戒)에 따라 그 명문을 그대로 썼다.

, 슬프다. 선생의 훌륭한 덕과 큰 업적이 우리 동방에 으뜸임은 당세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 후세의 학자들도 선생이 말씀하고 저술한 것을 관찰한다면, 장차 반드시 감발(感發)되고 묵계(默契)되는 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명문 중에 서술하신 것은 더욱 그 은미한 뜻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활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나는 선생의 장려를 받아 성취되었으니 부모와 천지의 은혜보다도 더한데 선생이 별세하니, 태산이 무너진 듯 대들보가 꺾인 듯하여 의귀(依歸)할 곳이 없다.

남기신 경계 말씀을 엎드려 생각하니 감히 어길 수가 없으나, 묘도에 게시하여 후세에 알리는 것을 또한 안 할 수 없으므로 그 대략을 기록하고 이에 대한 말을 붙인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단정하고 질서가 있었으며, 장성하여서는 더욱 함양하고 결점을 고쳐 나갔다. 중년 이후로는 부귀공명을 단념하고 오로지 학문 탐구에 힘써서 미묘한 진리를 환히 꿰뚫어 충적(充積)하고 발양하여 사람들이 측량할 수가 없었는데, 선생은 겸허하고 공손하시어 마치 아무것도 없는 듯이 하였다. 날마다 공부를 새롭게 하고 위로 천리(天理)를 통달하여 그치지 않았다.

출처와 거취의 문제에 있어서는 때를 보고 의리를 헤아려 자신의 마음에 편안한 바를 추구하고 또한 끝내 굽히지 않았다. 그 논저는 반복하고 무궁하며 광명하고 위대하여 한결같이 순수하게 정도(正道)에서 나왔으니, 저 공맹(孔孟)과 정주(程朱)의 말씀으로 헤아려 봄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 적다. 선생 역시 천지에 세워도 어그러지지 아니하고 귀신에게 질정하여도 의심이 없다고 이를 만하니, , 훌륭하다.

선생은 재취하였다. 먼저는 모군(某郡) 허씨(許氏)에게 장가들었는데 그는 진사 허찬(許瓚)의 따님으로 두 아들을 생산하였으며, 뒤에는 안동 권씨(安東權氏)에게 장가들었는데 봉사 권질(權礩)의 따님이니, 모두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아들은 장자 준은 봉화 현감(奉化縣監)이고, ()는 일찍 세상을 떠났다. 손자는 셋인데, 안도(安道)는 신유년 생원이고, 다음은 순도(純道)와 영도(詠道)이다. 딸은 둘인데 장녀는 선비인 박려(朴欐)에게 시집갔다. 측실의 아들로는 적()이 있다.

 

 

李壎(이훈) 護軍公諱壎墓碣銘(호군공휘훈묘갈명)

 

前面大字敦勇校尉龍驤衛副護軍 眞城李公之墓

宜人宣城金氏祔後

 

碑 文

公諱壎 字子和 李氏 眞寶人 始祖諱碩 密直使 生諱子脩 封松安君 生諱云侯 軍器副正 贈司僕寺正 生諱禎 府使 推曾孫退陶先生恩 贈戶曹參判 是爲公曾祖 祖諱遇陽 仁同縣監 考諱哲孫 承義副尉 妣淸州李氏宗源女 公生成化丁亥九月初一日 善武藝 旱事弓馬 隸別侍衛 屢發解以穿楊名一世 竟不闡 自分數奇 中歲遂廢擧 家素窶 力耕稼 晩致富 性喜施濟婚喪恤貧乏 不論親疎 弟堪早歿子女無依 敎育成立 無間己出 備田宅以處之 辛丑大饑流丐滿路 公設釜作粥 架板路傍 排粥鉢架上 往來飢隸跪取食 向家再拜祝釐者 日不知幾許人 其樂於爲善 施於不報如此 晩階軍銜副護軍嘉靖己亥十二月二十四日終于寢享年七十三 翌年二月窆于家南一里許西向原 配宣城金氏文節公從弟洪之女 墓祔後 二男一女 長演訓導 次漢直長 女適高胤元 訓導五子 希顔參奉 胤黃生員 希雍通政 希尹希說 直長五子希聖 贈參議 希孟忠順衛 希程引儀夢得夢蘭 曾玄孫以下不盡載 日公之耳孫顯東宇周書抵仁行曰 先祖葬時竪短碣石 久而泐宇缺而無微 方謀改刻 子居傍裔幸摭實以賁 隧儀 不可以不文辭謹依舊文參以曾孫松澗公遺錄 撰次如右 系以銘曰

射命中飛不翰 何命之舛兮 貧而富積能散 何修之善兮 昌厥後文有煥夫非錫之衍兮

門孫 仁行 撰

 

 

호군공 휘 훈 묘갈명

공의 휘는 훈()자는 자화(子和)이며 성은 이()씨이고 진보인이다. 시조 휘 석()은 밀직사(密直使)로 휘 자수(子脩)를 낳으니 송안군(松安君)에 봉해졌다. 휘 운후(云侯)를 낳으시니 군기부정으로 사복시정에 증직되었고 공의 증조이다. 조부는 휘 우양(遇陽)이니 인동현감(仁同縣監)이고 아버지의 휘는 철손(哲孫)이니 승의부위(承義副尉)이고 어머니는 청주이씨 종원(宗源)의 딸이다.

공은 성화(成化) 정해(丁亥세조 12, 서기 1467) 9월 초하루에 태어났다. 무예에 뛰어나서 일찍부터 활쏘기와 말 타기를 즐겨 별시위(別侍衛)에 등록이 되었다. 그러나 여러 차례 초시에 합격하고 활 잘 쏘기로 일세에 이름을 떨쳤으나 마침내 재능을 선양하지 못하고 스스로 불운함을 깨달으시고 중년에는 과업(科業)을 중단하였다. 집안이 본래 가난하여 농사일에 힘써서 만년에는 부유하였다. 공은 천성이 혼상(婚喪)에 시여(施與)하시고 가난한 이를 구제하시기를 친소를 가리지 않고 좋아했다. 아우인 감()이 일찍 세상을 뜨자 자녀들이 의지할 곳이 없게 되니 당신의 자녀처럼 교육시켜 성취시켜 전토와 집을 마련해주고 살게 하였다.

신축년(辛丑年, 성종 12, 1481)에 큰 흉년이 들어 걸식하는 사람들이 길거리에 가득 찼을 때에 공은 가마솥을 내어 걸고 죽을 쑤어 시렁을 길가에 매고 죽사발을 시렁에 배설하니 왕래하는 굶주린 사람들이 꿇어앉아 이것을 먹고는 공의 집을 향하여 재배하고 축복하는 자가 하루에도 얼마인지 몰랐다. 선을 행하기를 좋아하고 보답을 바라지 않고 베푸시기를 이같이 했다.

만년에 군함부호군(軍銜副護軍)에 오르시고 가정(嘉靖) 기해년(己亥年, 중종 34, 1539)에 집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73세였다. 다음 해 2월에 집 남쪽 1리쯤에 있는 서향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배위는 선성김씨 문절공(文節公)의 아우 홍()의 따님으로 공의 묘소 뒤편에 부장(祔葬)했다. 2남과 1녀를 두었으니 맏이인 연()은 훈도(訓導)이고 다음은 한()이시니 직장(直長)이다. 따님은 고윤원(高胤元)에게 출가하였다. 훈도공의 다섯 자제에 희안(希顔)은 참봉, 윤황(胤黃)은 생원, 희옹(希雍)은 통정(通政), 희윤(希尹)과 희열(希說)이다. 직장(直長) 공의 다섯 자제는 희성(希聖)은 참의(參議)에 증직되었고, 희맹(希孟)은 충순위(忠順衛), 희정(希程)은 인의(引儀)이고, 몽득(夢得)몽란(夢蘭)이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다 싣지 못한다.

하루는 공의 원손 현동(顯東) 우주(宇周)가 인행(仁行)에게 편지를 하고 선조 장례 때에 비석을 세웠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돌이 마멸되어 글자는 떨어져나가 상고할 길이 없어 개각(改刻)을 하려하니 당신은 방손으로서 사실을 참고하여 묘의(墓儀)를 꾸미도록 하라고 하기에 글이 짧다고 사양할 수 없어서 옛글을 상고하고 증손 송간공(松澗公, 庭檜)의 유록도 참고하여 위와 같이 기록한다.

 

 

李禎(이정) 贈嘉善大夫戶曹參判任善山都護府使府君墓碣

(증가선대부호조참판임선산도호부사부군묘갈)

 

李禎(이정) 贈嘉善大夫戶曹參判任善山都護府使府君墓碣(증가선대부호조참판임선산도호부사부군묘갈)

公諱禎眞寶縣人曾祖碩縣吏中生員 贈密直使祖子脩登第仕至判典儀以討紅賊功封松安君始來安東考云侯軍器副正 贈司僕正公有大志善射御 世宗朝北狄屢寇邊 朝命設寧邊鎭築藥山城以控制形勢公爲判官能蕫治底績復從崔潤德北征有功 賜爵歷韓山善山並有遺愛中以孫堣貴 贈通政兵曹參議今以曾孫滉故加 贈嘉善娶安東金氏知甫州挺之女有三男曰遇陽仁同縣監興陽訓鍊參軍繼陽進士六女壻南伯庚柳鳳壽鄭普文李疇朴謹孫權悰內外孫男女三十餘人曾孫男女蕃衍不可勝載云

曾孫 判中樞府事 滉 撰

 

증가선대부 호조참판 임선산도호부사 부군 묘갈

공의 휘는 정()이며 진보현인이시다. 증조 휘는 석()인데 현리로서 생원에 급제하였으며 증직이 밀직사셨다. 조부의 휘는 자수(子脩)인데 벼슬이 판전의시사에 이르렀고 홍건적을 토벌한 공훈으로 송안군에 봉군되었으며 처음으로 안동에 이거하여 살으셨다. 고의 휘는 운후(云侯)인데 군기시부정으로 증직이 사복정이셨다.

공은 일찍이 큰 뜻이 있어서 활쏘기와 말 타기에 능했다. 세종조(世宗朝)에 북쪽 오랑캐가 침입을 제압하기로 하였다. 공이 그때 판관으로서 이 역사를 감독하는데 공로를 세웠고 다시 최윤덕(崔潤德)을 따라서 북적(北狄)을 치는데 공로를 세워 작위(爵位)를 하사받았으며 한산과 선산부사를 역임하면서 치적을 남기셨다. 후에 손자 우()의 귀로 인하여 통정대부 병조참의를 증직 받았고 이제 또 증손 황()의 귀로 인하여 가선에 가증되셨다.

안동김씨 지 보주(知甫州) ()의 따님을 부인으로 맞아 삼남을 두셨으니 우양(遇陽)은 인동현감 흥양(興陽)은 훈련참군 계양(繼陽)은 진사였다. 따님 여섯 자매는 남백경(南伯庚) 류봉수(柳鳳壽) 정보문(鄭普文) 이주(李疇) 박근손(朴謹孫) 권종(權悰)에게 각각 출가시켰다. 외손 남녀가 삼십 여명이나 되고 증손 남녀가 번성하여 다 기록하지 못한다.

증손 판중추부사 황 근찬

 

 

 

 

李岐(이기) 墓碣銘(묘갈명)

 

李岐(이기) 宣祖 24年 辛卯(1591)~孝宗 5甲午(1654) 64. () 士夙. 號 守拙堂.

眞城人 退溪先生 曾孫. 東巖.

 

공은 어려서 가정교육을 잘 받아 규율법도에 어긋나지 아니하였고 雲川(운천) 金涌(김용)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장성하여서는 黔澗(검간) 趙靖(조정)의 사위가 되었다. 광해군 때 大北(대북)이 무옥을 일으켜 세상의 어지러워지자 이를 개탄하면서 仕進(사진)의 뜻을 버리고 거처하는 곳 동쪽에 정자를 지어 守拙堂(수졸당)이라 이름 하여 은둔하였다.

공의 묘는 청량산 북쪽 옥산에 있다.

둘째 아들 葛峯(갈봉) 克哲(극철)공이 선교랑으로 이천찰방에 부임하였는데, 과만하고 집으로 돌아 올 때, 그 고을 아전이 공금을 갑지 못한 혐의로 사형을 당하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자기의 재산으로 변재 하여 活人(활인)하여 주었다.

이는 남의 역경을 차마 보지 못하는 어진 마음이었지 그 은혜를 보답 받고자 함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아전의 아들은 아버지 재생의 은혜를 잊지 않고 報恩(보은)하기 위하여 풍수에 대한 학술을 정독하고 공부하여 그 후에 찾아와서, 이 옥산의 명당을 점지하여 주니, 찰방공이 양친을 그곳 길지에 이장하였다.

때는 숙종 18년 임신년(1692)이다. 이 명당은 玉冠子(옥관자)가 세말이 난다는 吉地라 하는데, 과연 이후 문과에 급제한 자가 22명이 배출되었다. 여담이지만 그 아들에게 나는?하니 이 터 하나만으로도 부귀와 영화가 대를 이을 것인데.....하면서 계하에 繼葬(계장)하라 하여서 찰방공도 連墳(연분)으로 入葬(입장)되어 있다. 묘갈명은 立齋(입재) 鄭宗魯(정종로) 찬이다.

參奉守拙堂李公墓碣銘 並序

眞城李寢郞野淳甫以其六世祖恭陵參奉守拙堂遺事屬余銘其墓曰公以文純公曾孫嗣聞前烈克持遺範兼以從師友講磨義理祛浮華敦本實鞱光自修不求知於人其蹟之可傳又爲鬱攸所滅今只有族祖永春公守貞所撰而亦失之太略故野淳謹復傍搜遠裒得若干如是盍賜之一言俾顯刻以詔後昆試閱之公盖從金雲川涌趙黔澗靖學又與金瓢隱是榲友善自少好讀書於心經朱子書用工尤深日用云爲一遵文純公遺訓間多手寫而膺服焉其操行爲一時所敬重光海乙卯見北論方張倫紀將斁絶卽廢擧曰此豈出脚時也遂隱居田園惟盡分於常行以終壽六十四撮其大節平生不以産業經心土田之出外氏者幾千畒而棄之如遺撫孤姪如己子愛庶弟益其田宅修明溫溪洞文純公舊䂓於經亂幾亡之餘以風勵之有削監司鄭造名於陶山尋院錄者被其怒索甚急公庇護之使得免於禍道儒以方伯欲害士林將疏斥其誣公據先生訓力言其過當此皆表著人耳目者也余感歎之遂記其世系生卒子孫如左而系以銘公諱岐字士夙祖諱寯僉正考諱詠道牧使以壬辰功贈左承旨妣淑夫人安東權氏冲齋忠定公橃之孫縣監東美女公以嘉靖辛酉五月日生卒於天啓甲子九月日方疾革精神不爽處置家事得無憾善乎亦君子之正終也墓在搴芝洞巽向原配安人豐壤趙氏卽贈參判黔澗靖女男長希哲察訪次克哲主簿女琴三達琴聖徽參奉任憲希哲男櫰贈吏參克哲男槼榘贈吏議櫰男守約參奉贈吏判柱男守經槼男守近守綱僉知守勛守徽榘男守元贈吏參守約男世震文科司書世觀世恒典簿世師文科知事守經男世復僉知世泰文科參議守近男世徵守綱男世浹世敬守勛男世範守徽男世命世魯守元男世翊同知世翕世習世立生員五世以下不能盡載而惟登科宦者龜元僉知龜書參奉龜容僉知龜雲文科今應敎龜星今縣監野淳參奉泰淳文科今郡守家淳參奉彦淳文科今縣監老淳進士彙遠生員銘曰

公鑿方塘一鑑中朗 誰云半畒吾見其廣源頭活水曰惟退溪重磨有方拙以思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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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봉 수졸당 이공 묘갈명 병서

眞城李(진성이) 침랑 野淳(야순) ()가 그 6세조인 공릉참봉 守拙堂(수졸당)遺事(유사)를 내게 위촉하며, 그 묘에 ()을 써 달라 하니 이에 다음과 같이 말을 한다.

공은 문순공의 증손으로 선대 위인들의 상속인이라 들었다. 고인이 남긴 모범을 잘 지키고, 아울러 師友(사우)를 좇아,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열심히 갈고 닦았으며, 실속 없고 겉만 화려한 일들은 모두 떨쳐버리고, 본질적으로 실속 있는 일을 더욱 도탑게 하며, 들어나지 않게 자신을 닦았다.

 

묘갈을 위하여 알아야 할 것을 다른 사람에게 구하지 아니하고, 전해진 유훈에서 구했다. 또한 없어져 막히는 바는, 지금 다만 族祖(족조) 永春公(영춘공) 守貞(수정)이 찬한 것이 있는데, 거기에도 역시 잃어버리고 대략 밖에 없어서, 삼가 다시 먼대서 찾아 모아 약간의 자료를 얻어 이와 같이 한 마디를 하니, 각으로 나타내어 후손들에게 고하여, 보도록 하겠다.

공은 雲川(운천) 金涌(김용)공을 따라 黔澗(검간) 趙靖(조정)공에게 배우고 또한 瓢隱(표은) 金是榲(김시온)과 좋은 벗이 되어 어릴 때부터 독서를 좋아하고, 心經(심경)朱子書(주자서)에 더욱 힘써 깊게 연구하여, 날마다 입에 올렸다. 文純公(문순공)의 유훈을 한결같이 지키며, 틈나는 대로 많이 手寫(수사)하여 가슴에 새겼다.

그 몸가짐과 품행은 한결같았으며 공경하며 소중하게 여겼다.

광해군 을묘년에 보니, 北論(북론)이 한창 성해, 인륜과 기강이 다 끊어지니, 과거에 니길 뜻을 버리고 이 어찌 발을 내 디딜 때인가.하였다. 드디어 田園(전원)에 은거하여, 오직 항상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일생을 마치니, 향년 64세였다.

크게 빛나는 절조를 지켜, 평생토록 사업을 경영할 마음을 내지 않았고, 외가에서 나온 전답 몇천 ()는 잃어버린 듯 버려두었다. 아비 없는 조카를 자식같이 돌보며, 서동생을 사랑해서 전담과 집을 더 주었고, 溫溪洞(온계동) 文純公(문순공)의 고택이 난을 겪으며 회손 된 것을 깨끗하게 수리 하였다.

풍속을 권장하였으며, 도산서원 방문록에 있는 감사 鄭造(정조)의 이름을 서원의 錄事(녹사)가 삭재하니, 그에 심히 노해서. 급하게 찾으니, 공이 이를 덮어서 옹호하여 화를 면하게 되었다.

선비들이 관찰사를 해치려고 사림에서, 소장을 올려 그를 무고하려하니 공은 선생의 훈계에 의거 힘주어 그 과격함의 당위성을 말하여, 이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을 밝게 밝혔다.

그래서 나는 감탄하고, 그의 世系(세계)生卒(생졸) 또한 자손록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여 ()으로 이어가려한다.

공의 휘는 (), 자는 士夙(사숙)이며 조부의 휘는 ()으로 첨정, 부친의 휘는 詠道(영도)인 목사이며, 임신년에 공을 세워 左承旨(좌승지)로 증직되었다. 모친은 숙부인 안동 權氏(권씨) 冲齋(충재) 忠定公(충정공) ()의 손녀이며, 현감 東美(동미)의 딸이다.

공을 가정 신유 5월에 낳고, 天啓(천계) 갑자 9월에 질병으로 정신이 맑지 못하여 가사를 처리하지 못함이 유감스러웠으나, 군자다운 바른 임종을 잘 하였다. 묘는 搴芝洞(건지동) 巽向(손향) 언덕에 있다.

배위는 安人(안인) 豐壤(풍양) 趙氏(조씨) 參判(참판)에 증직된 黔澗(검간) ()의 딸이다.

아들이 둘인데, 장남 希哲(희철)은 찰방, 차남 克哲(장남 希哲(희철)은 찰방, 차남 克哲(극철)은 주부, 딸은 琴三達(금삼달)참봉 琴聖徽(금성휘)任憲(임헌)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希哲(희철)의 아들 ()는 증직 吏參(이참)이고다음은 ()이다.

克哲(극철)의 아들은 ()증직 吏議(이의)()이다. ()의 아들 守約(수약)은 참봉으로 吏判(이판)으로 증직되었으며, ()의 아들은 守經(수경)이다.

()의 아들은 守近(수근)첨지인 守綱(수강)守勛(수훈)守徽(수휘)이다.

()의 아들은 이참으로 증직된 守元(수원)이다. 守約(수약)의 아들 世震(세진)은 문과에 급제하여 司書(사서)가 되었고世觀(세관)전부인 世恒(세항)문과에 급제하여 지사가 된 世師(세사)이다.

守經(수경)의 아들은 첨지 世復(세부), 문과 급제하여 참의가 된 泰文(태문)이고, 守近(수근)의 아들은 世徵(세징)이다.

守綱(수강)의 아들은 世浹(세협)世敬(세경)이고 守勛(수훈)의 아들은 世範(세범)이다. 守徽(수휘)의 아들은 世命(세명)世魯(세로)이다.

守元(수원)의 아들은 종지 世翊(세익)世翕(세흡)世習(세습)생원 世立(세립)이다. 5세 이하는 모두다 기록 할 수가 없다.

그래서 登科(등과)하여 관직에 오른 자만 말하면, 龜元(구원)은 첨지龜書(구서)는 참봉龜容(구용)은 첨지龜雲(구운)은 문과에 급제하여 지금 응교龜星(구성)은 지금 현감野淳(야순)은 참봉泰淳(태순)은 문과에 급제하여 지금 군수家淳(가순)은 참봉彦淳(언순)은 문과급제로 지금 현감老淳(로순)은 진사彙遠(휘원)은 생원이다.

 

명에 이르기를

 

공은 마침 우물을 파서 公鑿方塘

거울같이 비쳐보며 마음 밝히니 一鑑中朗

누가 말하나 반 ()라고 誰云半畒

나는 그 넓이 보았는데 吾見其廣

근원에서 맑은 물 흘러내려 源頭活水

생각하니 퇴계라 하는데 曰惟退溪

마침 모난데 갈고 닦아 重磨有方

생각 가지런하게 나타냈네. 拙以思齊

 

 

 

 

 

 

출전 <한미녹대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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